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908년 3월 12일 문태서가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서하면사무소 소재지인 송계마을 건너편에 있는 신기마을(일본군은 신평이라고 표기함)에서 일진회를 비롯한 매국노들로부터 의병활동에 필요한 자금과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활동을 안의순사주재소에서 파악하고 함양읍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보고하였다. 함양군에는 일본군 한국주차군 함양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수비대장이 니시하라 중위(西原)였다.1) 중위가 지휘하는 한국주차군 군사조직은 중대급이었으며 병력은 110명 정도였다. 함양수비대 중 조장과 대원 7명이 3월 13일 오후 3시경 함양에서 출발하여 오후 7시 30분경에 대황령(지곡과 서하사이의 고개)에 도착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역 형세를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50여명의 의병부대들을 추격하기 위해 고작 8명의 군인들을 파견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함양읍에서 출발하여 지곡면 덕암리를 거쳐 서하면 대황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이용하면 도착시간은 기록과 일치한다. 의병부대들은 신기마을에서 자금과 군수물자를 마련한 후 서하면 우전마을로 향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의병들은 신기마을에서 우전마을로 행진할 까닭이 없다. 우전마을은 황석산 기슭 막다른 계곡에 있으며, 서상면 남덕유산 기슭에 위치한 영각사와는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13일 오후 10시 대황령을 출발하여 야간행군을 하면서 서하면 봉전마을에서 황석산 정상방향으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우전에 도착했으며, 의병부대들이 거기마을로 향한 것을 알고 따라잡기 위해 급행군 하였다. 밤 10시에 대황령을 출발하여 우전마을을 거쳐 거기마을로 갔다면 당시의 도로 사정이나 산림의 사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군이다. 그리고 3월 13일은 음력으로 2월 10일 임으로 달빛의 도움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소한 화림동계곡을 자기 동네인 양 야간행군을 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거나 지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된다. 우전에서 의병들이 거기마을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다시 우전마을에서 거기마을로 출발하여 14일 오전 6시에 거기마을에 도착한다. 거기마을에서 문태서 의병부대가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던 무리들을 규합하여 규모가 백여명이 넘었으며, 13일 밤에 서상면 육십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는 정보를 수집하였다. 일본군들은 문태서 의병부대를 추격하기 위해 다시 오전 7시에 거기마을을 출발하여 오후 1시에 서상면 상남리 신기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13일 오후 3시에 함양을 출발하여 오후 7시 30분경 대황령에 도착했고 밤 10시에 대황령에서 우전으로 향했고 우전을 거쳐서 새벽 6시에 거기마을에 도착했으며, 아침 7시에 거기마을을 출발하여 낮 1시에 서상면 상남리 신기마을에 도착하였다. 일본군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함양-지곡주암-서하대황마을까지 이동하면서 4시간 30분을 사용하였고, 이후 우전-거기-육십령-신기마을까지 쉬지 않고 행군하였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거의 산악지역의 소로나 길이 없는 곳 20㎞를 걸었을 것이다. 통상 산악지역 행군 시간은 평지의 두배 이상이 소요된다. 길이 잘 나 있는 도로에서라도 훈련된 군인의 걸음걸이는 시간당 6킬로미터 정도이다. 함양에서 출발해 서상면 상남리 신기까지 24시간 행군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여기서 문태서 의병부대의 입장에서 기록을 재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상상이 가능하다. 서하면 소재지 송계마을과 서하 신기마을은 개울 하나 건너 이웃 마을이며 경작지가 비교적 넓은 곳이다. 우전마을은 황석산 기슭에 자리잡은 화전민촌 수준이다. 거기마을은 산간지대이긴 하나 비교적 경작면적이 넓은 마을이다. 그렇다면 문태서 의병부대는 둘로 나누어 활동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신기마을과 거기마을에서 친일분자들에게서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징발했을 것이며, 나머지는 안의방향에서 오는 일본군경을 막아내기 위해 우전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하 신기마을에 50여명이 나타났고 거기마을에서 인근을 배회하던 무리를 규합한 규모가 100명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마을에서 서상면 도천마을을 거쳐 오산, 동대, 신기마을을 거쳐 남덕유산 정상부근으로 이동하는데는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일본군들은 거기마을에서 서상면 도천 마을을 거쳐 다시 서상면소재지 칠형정부락을 거쳐 육십령까지 올라갔다가 신기마을로 내려온다면 약 16.8㎞를 행군하게 된다. 비교적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면, 위에서 지적한 내용대로의 일본군의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신기마을에 도착하여 망원경으로 남덕유산과, 영각사, 그리고 주변을 관찰한 결과, ‘신기 북방 약 2000미터 영각사 북방고지상에 2~3개의 적도 전망초같은 것을 보고 또 영각사에 수명의 적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에 따라 영각사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부대를 추적하여 나아갔으나 짙은 소나무숲 때문에 전방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함양에서 출발한 일본군이 서상면 신기마을에 도착하기까지의 행군일정은 기록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군이 지나온 지역의 대부분은 영각사주변의 산림지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 형세에 익숙한 의병들의 전투능력을 간과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빠른 이동은 죽음을 무릎 쓴 모험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이 제아무리 신식총과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지라도, 일개 군지역에 배치된 수비대 8명으로 100명이 넘은 의병부대를 추적했다는 기록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그렇게 무모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의병이 오합지졸이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24시간 계속된 행군으로 지친 상태에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의병부대와 전투를 벌이겠다는 일본군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드디어 일본군 기록에 의한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3월 14월 오후2시 20분 경 경각사 동방 약 해발 천미터의 고지상에 자리잡은 의병부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동시에 영각사 서방 천오백미터 고지상에서도 50명 가량의 의병부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잠시 후 다시 약 40명의 의병들은 영각사 남방 약 해발 600미터 계곡에서 일본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동, 서, 남쪽 방향에서 의병들이 공격해 왔다. 영각사는 지형상으로 보면 북쪽은 남덕유산 정상으로 해발 1500미터, 동쪽은 800미터, 서쪽은 700미터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은 해발 600미터이고 경사도가 낮은 비교적 평지에 속하는 곳이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영각사 부근으로 유인하여 북쪽, 동쪽, 서쪽 고지에서 사격으로 지원하였으며, 남쪽 입구를 봉쇄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막았다. 일본군의 사기를 꺾은 후에 남쪽 의병부대가 백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얼마 뒤 돌격하는 의병들을 격퇴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고지에서 사격을 통해 지원하고 있는 의병부대들을 향해 공격하면서 전진하였다고 하였다. 일본군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고지에 있는 의병들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은 일본군들이 물러간 줄 오판하고 영각사에 다시 집결하고자 했지만 일본군들의 강력한 화력에 밀려 다시 산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그리고 추격을 계속했지만 어두운 밤, 소나무숲 등의 장애로 인해 추격을 포기했으며, 전투를 마무리 짓고 주변을 확인한 결과 5구의 사체를 발견하였으며, 기타 사상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의병부대를 문태서장군이 이끌고 있었으며, 규모는 백십여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 명이 넘는 의병부대와 8명의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당시 함양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규모가 중대급으로 약 110명 정도였다. 익숙하지 않은 지역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선발대, 본대, 후발대로 편성하여 경계를 하면서 행진하는 것이 기본 수칙이다.2) 문태서 의병부대 규모를 50명정도로 파악했다가 후에 100여명으로 수정해서 기록하고 있고, 말미에 11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은 전투에 필요한 최대의 병력을 동원했으리라 판단한다. 의병들은 영각사를 중심으로 남덕유산 정상 방향인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에 전투병력을 배치하여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는 의병들이 펼쳐놓은 전장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피해는 엄청났을 것이나 아쉽게도 우리는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없으며, 다만 동서남에서 의병들이 공격했고, 백병전까지 벌였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지 않은 일본군의 피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각사전투’벌어지기 일주일 전인 6일에 金東臣이 이끄는 의병 800여명과 일병 70여명이 거창군 매학(梅鶴)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3) ‘영각사전투’가 시작된 날 덕유산 북쪽 진안에서는 남원 의병들이 일본군 토벌대(吉川討伐隊)를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며,4) 17일에는 안의의병 100여명이 무주에서 일본군 함양수비 분견대 포위 공격하였다.5) 19일에는 의병 150여명이 덕유산 동쪽에 있는 김천시 지례면 덕산(知禮 德山)에서 일본군 지례수비대를 공격하였다.6) 20일에는 의병 70명이 장수군 천천면에서 장수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7) 이 모든 기록을 종합하여 해석하면 ‘영각사전투’와 주변에서 벌어진 지역전투는 계획된 것이었다. 김동신과 문태서는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의 실패를 보면서 의병들이 일본군경을 대상으로 정규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덕유산을 근거로 하여 지역단위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결정을 내렸을 것이며, 대부분 지역농민들로 이루어진 의병들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이전인 3월에 의병들이 대공세를 벌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동시다발적인 지역전투를 펼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의병편Ⅱ (二) 二月, 慶尙道 21. 居秘 第四○四號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의병편Ⅱ (二) 二月, 慶尙道 34. 居發秘 第五一號의 一『咸陽守備隊에서는 去十二日 밤 賊魁 李圭喆이 이끄는 暴徒 四十餘名이 咸陽西方地區를 通過北進하였으므로 長水 方面에 向하여는 興原斥候로 하여금 追躡케 하고 安義 西上面 方面과 安義 長水 間의 搜索에는 西原隊長 以下 下士卒 九名과 咸陽巡査駐在所 海江田 巡査部長 以下 巡査 五名으로 하여금 晝夜兼行 三日에 걸쳐 行動하였는데』3)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p. 231. 4)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p. 456.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p. 460.6)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p. 525.7) 황성신문 1908.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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