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가을이다. 산속에 살면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다채롭다. 오도재만큼 함양에서 가장 빨리 가을을 마주하는 곳이 있을까. 구름이 적고 하늘이 높아지고, 볼을 스치는 바람이 쌀쌀해졌음을 느끼는 일. 여름옷을 하나둘 정리하고 묵혀두었던 겨울 이불을 꺼내는 일. 밤을 따러 갔다가 모기에 왕창 쏘여도, 밤 가시 사이로 밤을 꺼내느라 찔린 손가락이 따끔거려도 저녁에 모여 앉아 삶은 밤을 숟가락으로 긁어 먹는 재미에 그 가려움과 아픔은 잊히는 계절. 선선한 바람 사이로 문득문득 할머니 밭에 있는 큰 밤나무를 힘차게 걷어차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나무 멀찍이서 후두두 떨어지는 밤들을 구경하고 지금 내 손바닥만 하던 발로 밤 가시를 쪼개던 날들. 열심히 밤을 털고 주워 제사를 지내는 밤이면 들리던 사각사각 밤칼 소리. 할머니는 제사가 끝나고 가장 먼저 밤을 먹어야 야무진 자손을 낳는다며 꼭 쥐여주시곤 했는데 미처 다 벗겨지지 않은 속껍질의 쌉쌀함과 살짝 마른 밤의 고소함은 그야말로 쪼글한 가을 한 줌의 맛이었다. 카페에 놀러 온 이장님은 옛날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시는데 마천면은 산이 높아 칡이 지천이다. 9월이 제철이라 칡꽃은 덖어 꽃차로 먹고 뿌리는 약으로 먹는데 봄이면 새로 뻗어나는 새순은 ‘갈용(葛茸)’이라 부르며 덖어서 차로 달여 마신다고 했다. 그래서 부잣집은 녹용을 먹고 서민들은 갈용을 먹었다는 시절도 있었다던 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한다. 조선시대 월별 농촌의 모습을 담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선 음력 8월을 이렇게 노래한다. “팔월이라 중추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 나무꾼 돌아올 때 머루 다래와 같은 산과일도 따오리라. 뒷동산의 밤과 대추에 아이들은 신이 난다. 알밤을 모아 말려서 필요한 때에 쓸 수 있게 하소. … 북어쾌와 젓조기를 사다가 추석 명절 쇠어보세. 햅쌀로 만든 술과 송편, 박나물과 토란국을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이웃집이 서로 나누어 먹세. 추석날 밝은 달 아래 기를 펴고 놀다 오소. … 금년에 할 일을 다 못 했지만, 내년 계획을 세우리라. 풀을 베고 더운 가리 하여 밀과 보리를 심어 보세. 끝까지 다 익지 못했어도 급한 대로 걷고 가시오. 사람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도 마찬가지이니, 잠시도 쉴 사이가 없이 마치면서 다시 새로운 것이 시작되도다” 필자의 유년기 농촌의 추억도, 지금 함양의 풍경도 농가월령가의 노랫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가월령가 속 가을 9월은 수확의 계절임에도 많은 걸 움켜쥐려 하지 않고 다 담지 못한 것은 다음 계절로 흘려보내는 달이리라.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는 멀리 가지 못한다는 어느 책의 구절도 떠올린다. 다 수확하지 않은 감은 홍시로 익기를 기다리고 ‘까치밥’이라는 정겨운 문화도 있듯이 말이다. 그 어떤 일에 아쉬움이 없을까. 올해 다 익지 못한 걱정과 근심이라면 더더욱 급한 대로 걷고 가자고 다짐해본다. 가마솥에 식혜를 한가득 끓여 뜨겁게도 먹고, 하룻밤 식혀 얼음 동동 띄워 먹는 추석이 곧이다. 이번 한가위에는 농가월령가 속 이야기처럼 이웃과 많은 것을 나누는 따뜻한 소식으로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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