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에게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은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아 그거, 광주에서 민주화 하려고 한 운동’ 간단하다거나, 다소 꾸밈새가 모자라다는 식의 야박함에 찔릴 수도 있는 대답의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대답이 불친절하다거나, 잘 모르고 대충 넘기는 소리라거나 하는 식의 결론은 절대로 내리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굳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핵심적인 내용을 떠올릴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5·18민주화운동이 이 정도로 대중의 머릿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 또한 존재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광주, 5월 18일, 계엄군, 이런 키워드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실패’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 때문이다. 즉 5·18민주화운동의 정당함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끝이 좋지 못하게 끝났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오랜 수난의 역사에서, 5·18민주화운동은 그 시작은 있을지언정 완전한 끝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과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이야기 하나를 잠깐 언급해보겠다. 그라쿠스 형제는 갈수록 상류층 귀족들만의 전유물로 전락해가는 정치 체제를 적극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야망이 실리기도 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혁에는 자신들의 조국을 소생시키겠다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민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원로원에 반영해 로마 공화정의 건전성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원로원 계급 자체의 소멸을 야기하는 농지법을 무리하게 시행하다가 원로원에 의해 피살당해 죽었고, 그들 형제의 꿈은 좌절되었다. 이는 공화정 자체의 자정 능력 상실과 모순을 지대하게 노출시켜 훗날 로마 제국이 세워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라쿠스 형제의 꿈은 과연 좌절된 것이며 그들의 정치 활동과 행적들은 모두 그들의 죽음으로 무의미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형제의 민중 사상은 결국 로마를 바꾸었고,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다. 광주시청이 다시 계엄군의 발걸음으로 가득차고, 전두환의 사진이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5·18민주화운동의 소멸이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훗날 6월 항쟁의 현장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던 결연한 의지의 시민들의 모습들은, 왼손에 민주주의와 오른손에 자유를 쥐고 놓지 않으며 옳지 않음에 저항했던 그들의 차오르는 가슴에는 5·18민주화운동이 새겨져 있지 않겠는가. 다시금 그 계절이 찾아왔다. 서울의 봄을 위시한 집단적 민주화 열풍이 우리나라에 퍼졌던 때, 학생들을 중심으로 18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악몽을 끝내려 시도했던 때, 서울역 광장 앞에 놓인 즉각적인 민중항쟁의 선을 넘지 않고 돌아갔던 때, 그리고 외부와 고립된 채 마지막 불씨를 끝까지 사수하려 발버둥 쳤던 광주 일대의 민중항쟁이 사라지지 않을 잔향을 남긴 채 역사책의 모든 페이지에 맹렬한 잉크로 그 이름을 적실 때의 계절이다.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마음에 품어두는 감상이 떠오른다, 슬프고 고달픈 항거의 계절이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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