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하나도 없는 드립백 포장지를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Duper Single Origin Kirinyaga AA TOP, Kenya Prum/Rooibos/Chocolate/winey Altitude-1800m Region-Kirinyogo Mukengenio Variety-SL 28/SL 34 Process-Wshed 포장지의 이 영문은 커피가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인지, 어떤 맛이며 고도가 어느 정도이고 출신지가 어디인지 어떤 품종인지 공정은 어떠한지를 설명한 것 같은데 드립백을 사는 사람들은 이 내용을 다 읽는 것일까 싶던 것이다. 쉽게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는 단어를 검색해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글을 두고 굳이 영어표기를 하는 우리 사회의 면면에 직면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대학원시절 우리 말과 관련한 논문 발표에 간판연구 부분이 있었는데 범위지역 내 다수를 차지한 영어간판을 사용하는 이유가 ‘매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많았다고 했다. 그 논문이 인상적이어서 몇 년 후 학생들과 ‘외국어사용. 실태조사’를 계획하고 간판(함양읍으로 제한)·과자·자동차·잡지·화장품·의류를 대상으로 조사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함양읍의 간판 중 약국은 전부 한글이었고 화장품과 자동차는 대부분 외국어를 사용했다. 의류와 과자와 잡지도 외국어 사용이 많았다. 외국어가 우리사회의 곳곳에 등장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되었지만 프랑스의 향수 “CHANCE CHANEL”을 ‘상스 샤넬’이 아니라 ‘찬스 채널’이라고 읽어 의도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묘한 뉘앙스를 가진다. 제품에 따라 겉포장지에 한글표기 태그도 살짝 붙이지만 상품 자체에 한글표기는 없다. 필기구의 독일, 일본 제품은 모두 영문표기다. 수출과 수입이 뒤섞인 현대사회는 외국어에 직면 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오래 전 어느 교수가 주요 일간지의 칼럼에서 ‘단순하다’는 모자란다는 의미로 읽으면서 ‘심플하다’는 멋있다고 생각하고, ‘날카롭다’고 하면 부정적으로 치부하면서 ‘샤프하다’고 표현하면 이지적으로 생각하는 언어사대주의가 있다고 썼다. 지금은 영문약어도 빈번하게 출몰하고, TV도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남발하고 있어 ‘외국어 사용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지만 자국어를 비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태도다. 한글사용이 무방한데도 굳이 영문표기를 하는 것이 상품의 질이 좋아 보이고, 그래서 매출이 높아지도록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구매자 모두 외국어사용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므로 정보전달에 일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은 모를지라도 네임밸류namevalue에 힘입어 구매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소비자가 인지해야 할 정보가 차단되는 것이 불편한데도 별다른 내색없이 감수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자국어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에 대한 각고恪固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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