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한번 사귀면 내가 절대 먼저 안 버려. 나를 떠났다면 그건 내가 잘못해서 떠난 거라 생각해. 그래야 야당하지 그러지 않으면 야당 못해”   보수정당의 텃밭이던 지역구에서 평생 민주당 옷을 입고 활동해 온 허태오 원방장학회 이사장. 나이를 속이고 19살 때부터 80세가 된 지금까지 민주당 1세대의 산증인으로 남아 현재에 이른다. 두 번의 도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던 허태오 이사장은 모든 당원들이 떠났던 시절에도 홀로 남아 함양군에서 민주당 간판을 지켜왔다.함양군의 민주당 야당 역사를 써내려온 허태오 이사장은 모든 행동의 시작에 ‘함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달았다. “국회의원하고 장관하면 뭐 할건가 그런 건 당대에 끝나는 거지” 고향 마천면을 지키며 그가 평생 일군 일 중 가장 보람된 것은 장학회를 만드는 것에 일조한 것이다. 집에 돈이 없어 학교를 중퇴했던 허태오 이사장은 배움에 항상 목말랐다. 6.25전쟁통에 학교가 불타버려 그나마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도 교실 구경은 못했다.    교실대신 냇가에서, 들판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고향 후배들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고 싶었던 바람으로 허태오 이사장은 믿음직한 심부름꾼을 마다하지 않았다.마천면에는 함양 지역 내 가장 많은 장학회가 운영되고 있다. 화산장학회, 마석장학회, 신기장학회, 원방장학회. 4개의 장학회는 모두 허태오 이사장과 인연이 깊다.마천면장을 지냈던 박동준 면장이 마천농협에 판 땅값으로 만든 것이 화산장학회다. 박동준 면장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돈을 의미있게 쓰고 싶다고 하여 허태오 이사장의 제안으로 화산장학회가 만들어졌다.많은 스님을 배출한 마천면의 특이한 이력에 걸맞게 마석장학회는 스님들이 만든 장학회다. 장학금을 낼테니 관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허태오 이사장은 장학회를 만들도록 했다. 마석장학회는 불국사 주지 원서스님, 양산통도자 부주지 중래스님, 성가대학 학장 묵언스님, 돌아가신 불암사 주지스님이 참여했다.신기장학회는 마천면 출신 이병원씨가 후학양성을 위해 힘 써 온 것이 바탕이 됐다. 장학금 외에도 이병원씨는 마천면에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다. 겨울에도 가을 옷을 입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허태오 이사장은 이병원씨에게 도움을 요청, 당시 시중에 처음 나왔던 오리털점퍼 520벌을 지원받았다. 이병원씨는 추가로 환갑을 넘긴 어르신에게도 500여벌의 오리털점퍼를 선물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도 이병원씨는 학생들의 교육환경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500여만원이 넘는 인쇄기를 지원(당시 함양관내 인쇄기는 한 대 뿐)해 13명의 학생이 진주지역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성과를 거뒀다.원방장학회는 서울에서 정육점을 하여 큰 부자가 된 박경호 어르신이 10억1천만원을 출자하여 만든 장학회다. 집에 불이나 힘들었던 때, 쌀과 보리를 보내 준 허태오 이사장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던 박경호 어르신. 허태오 이사장의 장학회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만들어졌다. 매년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여 최근까지 2억여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마천에 애정이 없다면 힘들고 수고스러운 일을 해 온 허태오 이사장. “상대를 만나면 참 재미가 있어요. 모두 웃으면서 돈을 주셨지. 나를 위한 게 아니고 지역을 위한 일이니까. 장학금은 마천을 책임지는 후세를 키우는 발판이 되는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셨어. 내가 심부름을 잘 했으니 믿고 주신거지”그동안 심부름을 잘 해 온 허태오 이사장은 마천을 위해, 함양을 위해 많은 힘을 써왔다. 한화갑씨의 도움을 받아 서울 노선이 처음 생기도록 했으며 마천·백전면에 한봉단지를 조성하여 주민들의 고소득 창출에도 기여했다. 김동영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여 마천면 전체 마을에 전기가 공급될 수 있도록 결과를 얻어냈다.‘돈 잘못 받으면 인생 베린다’고 말하는 허태오 이사장은 평생 돈을 가까이 하면서도 청렴을 유지해 지역의 진정한 어른으로 명예로운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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