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병곡면 도천리는 우동(愚洞,) 우계 혹은 우루목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가촌(內柯村)과 외가촌(外柯村)으로 이루어진 가촌마을과 우루목 마을을 합쳐서 도천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양에 몇 년을 살았었지만 도천리를 가보지 않았다. 용천송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도천리는 나뭇가지처럼 기다란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볼 것이 많았다. 늙은 용천송을 비롯해 하륜 부조묘, 하준수 생가, 진양 하씨 재실등이 있었다. 영화 ‘곡성’의 촬영지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뙤약볕이 내리던 날, 문충세가(文忠世家)라는 쓰여 진 대문 앞에 선다. 허나 커다란 나무대문에는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다. 자물쇠는 딱히 잠겨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열려있는 것도 아니다. 방문객을 무단히 허용했다면 형식적인 걸고리조차 없었을 것이다. 마침 마을분이 보이기에 물어보았더니 관리하는 분이 멀리 출타중이라고 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하륜 부조묘(河崙 不?廟)를 볼 때가 아직 아닌 모양이다. 안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못 만나는 것이다. 아쉬웠지만 발길을 돌린다. 다행히 도천리에는 아직 볼 것이 몇 군데 남아 있다. 어디부터 가볼까. 마을 입구에서부터 눈 여겨 보았던 곳이 한곳 떠오른다. 항상 마을 앞을 지나다니며 한번쯤은 가봐야지 했던 곳이다. 내가 함양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지나다니며 눈으로 보기만 했다. 삶이란 참으로 얄궂다. 십 년 전, 처음 보았을 때 ‘꼭 한번 가 봐야지’ 마음먹었던 그곳을 이제 가본다. 바로 경충재(景忠齊)로 문화재 자료 제486호이다. 경충재는 도천리 우루목 입구 우측 산 밑에 있다. 1837년(정해년) 3월 하상용등이 관청 감사에게 간하여 경비를 지원받아 문충공 하륜 선생을 위한 사우(祠宇)로 지어졌다. 1855년 하문도가 호정집을 중간한 장소이기도 했다. 1861년경부터는 위양서원(渭陽書院)으로 개칭하여 후진양성을 위한 서원으로 사용해오다가 학생감소로 폐교되었다. 경충재 앞에 올라서니 어디선가 꽃향기가 묻은 바람이 불어온다. 배롱나무가 붉은 꽃잎을 햇살에 불태우고 있다. 그곳에서 풍겨오는 향기인가? 바람과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여유롭게 만든다. 건물의 건축양식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지 않은 규모이다. 서쪽 2칸은 방으로 동쪽 2칸은 마루를 둔 형식이다. 십년 전 경충재를 멀리서 봤을 때 폐허 같은 낡은 건물이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깔끔하게 새 단장을 했다. 건물에 사용된 자재는 오래된 나무와 새로운 나무가 섞여있다. 오래된 나무는 비바람을 삼킨 만큼 골이 깊고 색이 검다. 깊어진 나무 골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예전의 누군가도 나처럼 이렇게 나무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나, 그리고 건물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 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마루가 깨끗하다. 누가 청소를 한 것일까. 낮은 마루에 앉는다. 마치 고향집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눈앞으로 푸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 먼 도로에는 차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바쁠 것이 없는 나는 하늘도 바라보고 하얗게 핀 개망초도 바라본다. 옥수수 밭에는 옥수수 알이 여물어가고 매미소리 시끄럽게 운다. 바람이 배롱나무를 흔든다. 또다시 꽃향기를 데려온다. 경충재는 소문나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 구경꾼은 아무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보다 소문나지 않은 곳을 더 좋아한다. 아무도 없어야 구석구석이 보인다. 아무도 없으면 마루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깊이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오래된 무엇과 교감이 가능하다. 오래된 곳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수없이 흘러간 시간과 흘러간 사람과 지금의 나는 서로 연결되어 마음을 주고받는 것인지 모른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