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살이 우리는 함양인입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맨주먹으로 운수업계 평정한 ‘촌놈 뱃심’
“외고집, 황소고집에 한번 돌아서면 끝이다.” 31살 늦깎이에 맨주먹으로 상경했다. 군대서 배운 운전기술이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파란만장한 시절’을 헤쳐왔다.정규도(80) 종로화물(주) 회장은 서울에서 4개의 운수회사를 운영하는 운수업계 대부다. 정 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는 종로화물 외에도 국도화물, 제일운수, 안진운수 등이 있다.촌놈이 못할게 어딨노?“함양 촌놈이 못할게 어딨노?”라고 하는 정 회장은 1938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봉산리 임내마을이 정 회장의 고향이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배포 하나만큼은 운수업계를 평정하고도 남았다.“안의 촌놈이, 함양 촌놈이 안되면 쎄리 받아 삐는 기지 뭐”라면서 크게 한번 웃는다. 정 회장은 “깡패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받아 삔 건 아니다”고 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꼴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란다.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보거나 당하면 그야말로 ‘쎄리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정 회장은 “그때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이다. 운수업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라며 맨주먹으로 상경해 갖은고생 끝에 화물운수업체를 창업하고 400여 회원사를 대표하는 서울화물운송사업조합 이사장에 오르기까지 ‘촌놈 뱃심’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사연을 풀어 놓는다.정규도 회장은 안의초등학교(제37회)와 안의중학교(제6회), 안의고등학교(제6회)를 졸업했다. 결혼 후 육군 2사단에 입대해 운전병으로 군대생활을 했다. 당시는 시골에서 운전할 일도 없었고 차 한대 보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당연히 운전면허증은 없었다. 입대 후 운전병 주특기를 받아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신규 운전병이라고 해도 누가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도 없었다고 했다. 비행장에서 혼자 운전기술을 습득했다. 운전 연습장이 비행장이라 사고 날 걱정도 없었다. 이리저리 하다 보니 운전기술이 익혀졌다고 한다. 3년 동안 운전병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31세 늦깎이에 무작정 서울로농토가 많은 것도 아니고 농사일 외에는 시골에서 직장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농사일로는 늘어나는 식구들을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서른한살이 되던 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가 가진 기술은 군대생활을 하면서 배운 운전기술이 유일했다. 마침 서울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손위 처남의 소개로 택시운전 기사 자리를 구했다.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군 운전경력이 있어도 일반운전면허증으로 전환해 주지 않았다. 운전면허시험을 쳐 정식으로 면허증을 따 택시기사가 됐다. “당시는 택시가 귀했던 때라 조금 과장하면 택시한번 잡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며 “합승은 기본이고 돈이 안 되는 코스는 승차거부도 예사였다”고 털어놓았다. 지금 법으로 보면 다 불법이지만 그때는 불법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고 한다. “불법인지 합법인지 몰랐고 조금이라도 더 벌 욕심에 낯선 서울거리를 열심히 달렸다”고 했다. 서울지리를 잘 몰랐던 운전초기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손님을 태웠을 때가 제일 곤란했다. 정 회장도 길이 서툰 데다 손님도 길을 몰라 헤매다 보면 한나절이 후딱 지나가곤 했다. 거리제 요금을 받던 시절이라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렸어도 같은 거리의 요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간혹 고생했다고 요금을 조금 더 챙겨주는 손님도 있기는 했지만 시간을 낭비했다고 택시요금을 아예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보람 있는 일도 많지만 울화가 치미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정 회장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한푼 두푼 열심히 돈을 모았다.택시운전으로 억척같이 살아택시운전을 시작한지 어느덧 10여년이 지났다. 마침 개인택시 제도가 생겼다. 정 회장은 개인택시를 신청했다. “우리나라 개인택시 1호가 아마 날거야”라며 택시 기사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정 회장은 개인택시를 하며 억척같이 모은 돈으로 택시를 한대 두대 늘려갔다. 그의 택시는 15대까지 늘었다. 1980년대 초 지인 3명과 동업해 마장동(답십리)에서 ‘영미흥업’이라는 법인택시를 창업했다. 각각 25대씩 모두 100대의 택시로 영업을 시작했다. 공동 대표 중 한사람이 수익금을 빼돌리는 바람에 부실해진 회사를 정 회장이 부채와 함께 모두 떠안았다. 그 후 회사는 거짓말처럼 번창해지기 시작했다. 택시회사를 확장하기 위해 현재 종로화물(주)가 입주한 성수동 400여평을 1억6000만원에 매입했다. 당시 평당 40만원이던 이 땅은 현재 5000만원을 호가한다. 이 부지를 매입할 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땅 주인이 잔금까지 받고도 한참을 비워 주지 않아 택시회사를 이전하지 못했다.계획이 뒤틀리는 바람에 정 회장은 택시운수업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화물운수업을 시작했다. 어쩌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하나 잡으면 무엇이든 곱이 됐다”는 정 회장.“그때만 해도 세월 참 좋았다”며 “돈을 갈고리로 검으려 해도 다 못 긁어모았을 정도였다”고 했다.한창 때는 5톤부터 20톤까지 화물차 900대를 보유했을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개인이 소유한 것으로는 전국 화물운수업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제주도 전체 등록 화물차가 600대 정도였다고 하니 단일회사인 종로화물의 규모를 짐작할만하다.화물조합 이사장에 선출맨주먹으로 상경한 정 회장은 “주위에 누구하나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도 없었다”며 “그동안 배짱 하나로 살아왔다”고 했다. 400여 회원사를 거느린 서울화물자동차운송사업조합 이사장이 된 것도 배짱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사장은 서로 하려고 탐내는 자리다. 화물공제조합 대표들이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다. 일행 중 누구도 상대하기를 꺼리는 한명이 정 회장의 머리를 툭 툭 치며 시비를 걸어와 한 주먹에 코뼈를 내려 앉힌 일이 입소문을 타고 회원사에 퍼져 이사장이 됐다고 한다.화물사업조합 이사장이 된 정규도 회장은 특수차량의 경우 공동배차 등으로 회원사들이 상생하는 길을 열기도 했다.정규도 회장은 쓰러져가는 재경 안의면향우회를 살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재경 안의면향우회 회장 재임시절 향우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안의면산악회를 발족했다. 향우회나 산악회의 모든 경비는 사비를 털었다.‘산 중의 산’은 역시 지리산운동과 등산을 좋아하는 정 회장은 바쁜 업무에도 주말마다 다른 읍면산악회에 참석해 전체 함양향우회를 화합으로 이끄는 가교역할도 했다. 덕분에 전국에 있는 산이라는 산은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정 회장은 그중에서도 고향의 산, 지리산을 최고의 산으로 꼽았다.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골프 실력도 수준급이다. 평생 한번도 하기 어렵다는 홀인원을 2번이나 했으면서도 “골프 실력은 개판이다”며 엄살을 부린다.모교인 안의초등학교 동창회장도 7년이나 맡았다. 매년 100만원씩 발전기금도 내놓았다. 오래전 안의중학교 체육관을 지었을 때는 500만원을 희사하기도 했다.“만만찮은 운수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때는 술을 짝으로 마셨다”는 정 회장. “이제는 소주 한병이면 족하다”며 요즘은 건강관리에 더욱 신경을 쏟는다.50여년 타향살이를 해온 정 회장은 “어렵고 뭐고 말도 못하지”라며 그동안의 고생을 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일을 쉬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회사에 나와 일할 것”이라면서 노익장을 과시 했다.최경인 대표이사·정세윤 기자·최원석 서울지사장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