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군민들에게 상림공원이란 휴식처이며 고향의 향수를 전하는 곳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그의 업적이며 유산이기도 하다.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로 묘사되는 최치원 선생이 천년이 지난 현재 한중 양국을 잇는 문화 아이콘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정치이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최치원 선생의 유물과 행적이 남아있는 지자체들이 앞 다퉈 ‘최치원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이 300여 곳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될 정도로 수많은 지자체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쫓으며 각 지자체들의 최치원 마케팅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글 싣는 순서>1. 최치원 그의 삶과 길2. 최치원 도시연합의 중심 경주시3.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곳 - 문경시·의성군4.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곳 - 군산시·정읍시5.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곳 - 합천군·해운대구6. 함양 상림공원과 최치원 역사공원천년 고도 경주.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도읍으로 번성했던 고도 신라는 최치원에게 있어 태어난 고향이며, 당나라 유학 이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추억이 어린 장소이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돌아와 자신의 뜻을 펼치려 노력했던 고뇌의 땅이기도 하다. 또한 신분제라는 벽에 막혀 신념을 꺾을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은 정든 고향, 신념의 땅을 버리고 타향을 전전하게 만들었던 애증의 땅이기도 하다. 경주에는 예상 외로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상서장과 독서장 등 대표적인 두 곳 만이 최치원 선생의 행적을 보여주었다.최치원 선생은 신라 귀족 사회에 동참하지 못하고 전국 각지를 전전했다. 그가 머물며 신라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 시무십여조 등을 만든 상서장. 그리고 그가 학문을 닦았던 독서당 등이 유일하다.천재의 고뇌가 가득한 ‘상서장’ ‘상서(上書)’란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린다는 말이다. 여기서 글을 올린 사람은 신라 말의 유명한 문장가 고운 최치원(857~?)이다. 고운이 상서할 때 살고 있었던 집이라 하여 상서장이라 불렀다. 상서장은 경주IC에서 직진방향으로 약 5분 정도만 차로 달리면 만날 수 있다. 경주국립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작은 주차장이 보이고 이곳에 주차를 하면 곧바로 상서장이다.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는 상서장은 최치원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이다. 현재 영정각 3칸, 상서장 5칸, 추모문 3칸,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와가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최치원은 과연 상서장에서 임금에게 어떤 내용의 글을 올렸을까? 894년 2월에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의 글을 올렸다. 나라에서 당장 시행해야할 십여 가지 조목의 글을 적어 올린 것인데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시국 등을 통해 살펴보면 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이반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의 글을 보고 감동한 진성여왕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해 그의 제안에 따라 개혁을 펼치려 했지만 중앙 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서장은 망해가는 나라의 어지러운 시국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가 어린 곳이다. 결국 진성여왕에게 바친 고뇌 어린 시무십여조를 비롯한 여러 정책은 채택되지 않았으며 이후 최치원은 해인사와 경주 남산 독서당 등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상서장에는 19세기 중엽까지 영당을 비롯하여 아무런 건물도 없었다. 고종 13년(1876)에 부윤 이돈상(李敦相)이 글을 지어 세운 상서장 비각(碑閣)은 현재 건물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 근대에 들어 1978년 후손들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매년 4월에는 후손들이 그의 영정을 영정각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은둔을 택한 최치원의 ‘독서당’최치원이 학문을 닦았던 독서당(讀書堂). 독서당은 배반동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는 서당으로 최치원이 나이 마흔에 공직을 떠나 은둔의 길을 걸을 때 그가 주로 거주한 곳이 독서당이다. 그는 독서당에서 거주하면서 ‘계원필경’, ‘석순응전’ 등의 저서와 ‘숭복사비’ 등 많은 비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독서당을 찾아 가는 길은 많이 험난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낭산이라는 곳에 있다는 정보만을 믿고 찾아 나섰으나 진입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인근 유적지의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물었으나 그 조차 정확한 위치를 알 지 못했지만 차량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략적인 위치를 전해 듣고 찾아 나선 독서당. 낭산 인근의 진평왕릉을 지나 황복사지 3층석탑 인근에 차를 주차한 이후 논두렁을 걸어 독서당을 찾았다. 후에 시청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독서당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아 특별한 관리는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한 독서당은 많이 초라해 보였다. 최고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독서당이 경주에서는 외면 받고 있었다. 함양에 독서당과 같은 유적이 있었다면 더욱 많은 관리가 이뤄졌을 것인데 조금은 아쉬움이 들었다. 독서당 내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다만 독서당 옆 비각은 문이 열려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독서당은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툇마루 앞쪽으로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중복된 보수의 영향으로 초석의 형태가 일관되지 않고 다양하다. 이 건물에는 ‘독서당(讀書堂)’과 ‘학사루(學士樓)’ 등 가로 90cm, 세로 50cm 2개의 현판이 있었으나 지난 2005년 도난당했다. 독서당 옆 비각에는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가 서 있어 이곳이 최치원 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곳임을 알려준다. 철종 원년(1850년) 만들어진 유허비만이 옛 모습을 담고 있다. 담장 밖에 최치원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있다. 독서당의 정면에는 경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개혁을 위해 몸을 바쳤으나 좌절된 최치원이 고뇌에 차 바라보며 한탄했을 당시 서라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서라벌이 바라보이는 낭산 아래 독서당에 섰을까. 6두품인 자신의 한계에 대한 한탄, 귀족사회에 대한 반발,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원망, 아니면 더 나은 사회를 이끌기 위한 원대한 포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 최치원의 이념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 낭산 아래 독서당이다. 최치원과 경주경주시는 최근 들어 최치원을 문화 트렌드로 관광 상품화 시켜 나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국 지자체를 묶는 ‘고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의 좌장 역할을 맡았다. 경주시에서 제안해 지난해 출범한 도시연합 협의회는 앞으로 최치원을 콘텐츠로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 최치원을 주제로 한 창작 뮤지컬 ‘최치원’도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지난해 실크로드 경주 2015 개최를 기념하며 (재)경주문화재단에서 제작한 뮤지컬이 선보이며 문화 콘텐츠로서의 최치원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이 뮤지컬은 고운벨트로 결성된 창원시, 군산시, 서산시, 문경시, 합천군, 함양군, 부산 해운대구 등 10개 시·군·구에서 공연을 계획 중이며, 최종적으로 중국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주시는 뮤지컬 최치원을 필두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인문 한류아이콘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경주시는 2008년 11월부터 중국 양주시와 우호도시 결연을 맺고 문화교류 등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군이 이보다 앞서 2007년 3월부터 양주시와 결연을 맺었었다. 또 경주시에서는 최치원 인문기념관 건립과 한·중 우호공원 조성 등 최치원 마케팅을 위한 사업들을 진행 중이다. 수많은 역사 유적이 산재한 경주시의 행보는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경주의 대표적인 최치원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상서장과 독서당의 관리 실태는 실망을 넘어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잡초가 무성하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상서장, 그리고 이정표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다시피 한 독서당만 보아도 경주시에서 최치원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강대용 기자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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