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탕에 나온 길이다. 열탕에 들어앉으니 온몸이 시원하다. 뜨거운 물에 몸 담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여름이라 그런지 실내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중년의 아낙이 몇 보이고 할머니들도 보인다. 때를 밀어주는 엄마와 딸도 눈에 들어온다. 다정히 때를 밀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탕에서 나와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때를 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무연히 고개를 든다. 까만 얼굴을 가진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나와 눈동자가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입안의 혀를 쩝쩝거린다. 할머니는 목욕탕 의자도 귀찮은지 그냥 바닥에 철퍼덕 앉아있다. 배를 보니 여럿명의 자식을 낳은 몸이다. 혼자서 몸을 씻고 있다. 할머니와 나는 등을 밀어줄 딸도 없고 그렇다고 손가락 발가락을 밀어 주는 엄마도 없는 것이다. 정신없이 때를 밀다, 또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당신이 나를 불렀던 것일까. 그제야 할머니의 마음이 보인다. 등 밀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가 등 밀어드릴까요?”“아이고 고맙구로.” 할머니의 입이 반가움으로 벌어진다. 그리고는 몸을 맡긴다. 문득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여기 만나는 이 사람이요. 내 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여기 만나는 이 사람에게 기쁨과 평화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럼 나는 이 낯선 노인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리라. 늙은 할머니에게서 비릿한 냄새가 후욱 코끝을 스친다. 오랫동안 뚜껑을 닫아둔 장단지에서 나는 냄새처럼 퀴퀴하다. 삶이 발효되면 그런 냄새를 풍기는 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몸에서도 이런 냄새가 스며 나올 것이다. 갈퀴 같은 손에는 검버섯이 앞 다투어 피어있다. 살집이 그리 많지 않다. 뼈를 싸고 있는 껍질만 남아있는 듯 느껴진다. 쭈글쭈글한 등에는 동전모양의 상처가 여기저기 옴팍 패여 있다.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일까. 마음이 쨔안 하다. 등에는 울퉁불퉁 척추가 튀어나와 있다. 허리부분으로 갈수록 조금씩 척추가 굽어든다. 손이 울퉁불퉁한 노인네의 척추를 지날 때 함양박물관에서 보았던 이남박이 떠오른다. 이남박은 오래전 많이 사용되었던 부엌살림중 하나다. 통나무를 둥근 모양으로 파내고 만들어진 바가지이다. 그릇 위쪽 안쪽 면에 둘레 방향으로 오톨도톨하게 요철을 내어 곡식을 문질러 씻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는 이남박 요철에 쌀을 문질러 씻었다. 그리고는 조리를 휘이휘이 휘둘렀다. 엄마의 손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는 조리는 신기하게도 때를 벗은 하얀 쌀알을 건져내었다. 마지막으로 돌과 함께 남은 쌀을 흔들면서 따라 내었다. 요철 부분으로 이남박 속의 물을 통과시키면 돌보다 가벼운 쌀은 울퉁불퉁한 면을 쉽게 통과했다. 결국 이남박 속에는 오롯이 돌만 남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남박은 돌과 같은 이물질을 쉽게 가려내게 했다. 더러움을 씻어내고 이물질을 분리하게 하는 물건, 그것이 이남박이었다. 이름 모를 할머니의 척추는 이남박의 요철을 닮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닿아가는 이남박의 요철과는 달리 할머니의 척추는 울퉁불퉁 더욱더 도드라져 있다. 세월의 질곡에 허리는 휘어지고 몸피는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등에 비누칠을 하고 깨끗한 물을 붇는다.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할머니는 나의 등을 밀어주겠다고 나선다. 함박꽃 같은 웃음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 천진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내 마음이 개운하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씻어준 이남박인 셈이다. 할머니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푼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내가 자비와 평화스런 마음을 선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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