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웃어른께 세배 드리는 풍습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요 아름다운 전통이다. 음력 1월1일을 명절로 정하여 뜻있게 보내는 풍습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유교 문화권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다. 제법 오래된 일이지만 베트남이 우리나라 6·25 사변과 같은 동족상잔의 피 흘리는 전쟁이 한창일 때도 설날만은 휴전을 하고 명절을 즐긴다는 소식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한 일이 있었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인지라 이 날을 뜻 깊게 보내야 한다는 마음은 양의 동서나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지구상의 온 인류들의 공통된 생각이리라.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설날을 참으로 뜻 깊게 보냈다. 웃어른께 지난 한 해 보살펴 주신데 대한 감사를 표하며 새해에도 변함없는 애정과 존경을 표시하는 뜻의 세배를 드리고 오늘날 내가 있게 한 조상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며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서로의 정을 나누는 참으로 뜻 깊은 날이다. 믿음이 다르거나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이유로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일을 생략하는 가정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세배만은 거의 모든 가정이 지켜 온 우리 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풍습이다. 세배는 예나 지금이나 웃어른께 먼저 드리는 것은 변함 없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대부 가정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사당에 가서 조상들에게 세배를 드려야 했다. 어느 대갓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첫째 며느리를 본 후 처음으로 설날을 맞이 했던가보다. 새해 아침 시부모되는 분들이 일찍 일어나 새 며느리의 세배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날이 훤히 밝아 와도 며느리가 세배하러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애가 탄 시아버지가 “어째 며늘아기는 새해 세배 할 줄도 모르는고....”하면서 하인을 시켜 물었더니 하인이 되돌아 와서 하는 말이 “새 아씨가 영감마님 사당에 다녀오셨느냐고 묻습디다요”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시아버지는 아차 싶어서 부랴부랴 사당에 가서 세배를 드리고 나서 기다리고 있던 며느리의 세배를 받았다고 한다 . 법도에 밝은 새 며느리는 일찍 일어나서 세배 드릴 준비를 마치고 시아버님이 사당에 다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 며느리 세배 받을 생각만 하다가 자기 할 일을 잊은 시아버지가 정초에 며느리에게 한 방 먹은 셈이 아닌가. 이 이야기는 병곡면 도천 조선조 초기의 대 학자 하륜 대감의 후손들인 진양 하씨 가문에서 있었던 실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 차례로 큰절을 올리면 어른들은 절을 받으면서 상대에 알맞은 덕담을 한다. 덕담은 대체로 복 많이 받을 것과 건강을 비는 내용이지만 상대의 특수 사정을 고려해서 하는 경우도 많다. 입시를 앞둔 학생에게는 입시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말을 하고 혼기가 찬 아이들에게는 배필을 만나기를 바라는 말을.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말들을 한다. 수년 전에 작고하신 분으로 거창 교육장과 우리 도 교육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신 함양 교육계의 원로 정순용 교장선생님은 설날 아침 먼저 내외분이 맞절을 하면서 덕담을 나눈 후 아이들의 세배를 받는다고 어느 술자리에서 이야기하신 적이 있는데 정말 본받을만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본다. 나도 그 어른의 본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정작 설날이 되면 어쩐지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실천을 못하고 있다. 나는 설날 아침 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간단한 덕담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봉투를 하나씩 준다. 그 봉투 속에는 아이들이 금년 한 해 동안 깊이 새겨서 실천하기를 바라는 금언을 적은 종이가 들어있다. 설날 새벽 일찍 일어나 아이들에게 줄 글자를 찾아 서투른 붓글씨이지만 정성을 다하여 써서 봉투에 넣어 둔다. 글자는 아이들 처지에 가장 알맞다고 생각되는 것들로 몸이 약한 아이에게는 건강하라고 강(康). 조금 게으르다 싶은 아이에게는 근면(勤勉). 좀 더 착실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실(誠實)등 좋은 말들만 가려서 쓴다. 덕담이 적힌 종이만 넣는 게 서운해서 세뱃돈으로 꼭 만원씩만 넣는다. 아이들이 그 봉투를 그 자리에서 뜯지 않고 후에 혼자서 보게 한다. 이렇게 덕담을 써 주어 아이들이 일 년 내내 보관하면서 수시로 보게 한지가 20년이 넘게 흘렀으니 아이들이 모두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그 아이들의 아들딸들에게도 덕담을 써서 주느라 고심을 해야 하니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딸들은 시집가서 먼 곳에서 살고 있으니 설날 아침에는 그들의 세배를 받을 수 없고 시가에서 제사를 모시고 와서 세배를 하면 그때 준다. 외손자들에게도 주어야 하니 봉투도 제법 여러 개를 만들어야한다. 근래에는 세배할 때 정에 겨운 덕담보다도 세배 받으면서 주는 세뱃돈의 다과에 따라 아이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새 해 첫날의 만남에 따뜻한 정이 흘러야지 돈이 앞서서야 되겠는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세태의 흐름이 마음 아프게 한다. 우리 겨레만이 가진 아름다운 전통인 세배 문화가 물질보다는 정신이 앞서는 건전한 전통으로 길이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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