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사용능력 신장’은 초등국어교육과정의 주요목표 중 하나다. 학교는 주 5시간 편성된 국어교과의 말하기·듣기·읽기·쓰기·문법·문학 시간을 통해 올바른 언어사용에 대한 교육을 한다. 그런데 세상이 돌아가는 한 면을 보면 국어교육의 언어사용능력신장은 실효성이 미비한 것 같아 학교교육과 사회의 괴리를 실감한다. 이 괴리가 언어사용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과 밀접한 어떤 상징이 된다는 점에서 곤혹스럽다.
언어사용능력은 문법적인 바른 말을 사용하면서 듣는 이가 불편하지 않도록 좋은 말과 옳은 말, 맥락이 뒤틀리지 않고 언행이 일치하는 언어구사를 의미하는데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신출귀몰한 언어사용을 보면 당혹스럽다. 사회적 이슈를 노리는 발언과 대놓고 시도하는 왜곡과 기묘한 문장을 구구절절 구성하는 능수능란함을 보노라면 그 미묘한 언어의 배치와 배열이 놀라울 지경이다.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기도 하고, 요령껏 짜맞추기도 하고, 공격과 방어의 수단으로 비틀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부풀리기도 하는 교묘한 언어사용능력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화면 밖의 일반인들은 맞는 말이 어떤 것이며 믿어야 할 말이 어떤 것인지 냉철하게 판단하기보다 자기가 속하고 싶은 편의 말을 신봉한다. 다수가 몰리는 쪽으로, 세대의 특성에 따른 단편적인 판단으로, 혹은 알고리즘이 인도하는 유튜브를 신봉하고 방송에 출연한 게스트들이 떠드는 대로 믿기도 한다.
자극적인 선동의 언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상이 따로 있다. 그들의 카테고리 안에서 그들이 구축한 바운더리boundary를 벗어나지 않으며 믿는 대상의 언행에 의문이 없다. 자의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객관성을 유지하며 어떤 범주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고 언어사용에 문제가 있을 때 외면하지만 선동에 취약한 사람들은 무조건 따르는 경향이 있다. 저속하고 막된 언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여 만인에게 경악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환호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화면으로 보면서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언어와 종교언어는 혼란스럽고 일부 유튜버의 저속한 언어는 멀미가 난다.
횡설수설하는 말은 갈피를 못 잡으니 믿을 바가 못 되고, 나중에 하는 말은 시간을 두고 전략적으로 가다듬은 말이 되므로 진실성이 결여되고, 정도를 넘어 선 격한 말은 비이성적이며,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은 속임수가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무릇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 했다. 그러나 이런 금언을 마음에 품는 자는 드물고 쓴소리는 외면하거나 질타를 받는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교과서적 교훈을 묵살하고 쓴소리 보다 험하고 거친 말을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삶에 임하는 태도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지, 명예를 소중히 하는지, 언어사용능력이 올바른지, 추구하는 목적이 위법하지 않는지, 말에 책임을 지는지, 신의를 쉽게 버리지 않는지를 따져 보면 사람이 제대로 보인다. 말에는 인격과 가치관과 앎이 반영되기 마련인데 청자가 이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정선되고 정연하고 청자가 자연스럽게 설득이 되는 말은 기교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진심이다. 얽히고설키고 뒤섞인 말의 향연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 말들에 귀가 솔깃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언어사용능력을 위한 국어교육은 무엇을 했나 싶다. 새삼 교육은 여러면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느낀다. 언어사용은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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