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의 ‘나’는 “지금의 자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가 자기에게 전염되어 그들의 말투를 섞은 것이 자기의 말투라고 말한다. 코로나19의 상황에 놓여있는 현실에서 이 ‘전염’과 ‘섞임’이라는 말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말투나 스타일의 차원을 넘어 생존과 관련되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전염과 섞임에 사람들이 이토록 과민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마스크는 전례가 없었던 공포의 상징이며 전염을 차단하기 위한 안간힘이다. 코로나19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신종플루 때나 메르스 때와 달랐다. 사회적 분위기가 준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나 실내에서나 마스크를 쓰지않은 사람이 없고,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잔기침을 할 때 눈치를 보고 눈치를 주는 이런 형국은 처음이었다. 정부가 확진자 수와 동선을 연일 보도하고 예방수칙과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랐던 그때와는 인식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코로나19의 상황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종교와 행정과 각양각색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고 오랑은 봉쇄된다. 의사 리유는 신의 뜻에 ‘반항’하는 ‘치료’만이 페스트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타루와 연대조직을 계획한다. 코로나19에도 양상은 달랐지만 종교집단의 문제가 발생했고, 사명감을 가진 의료진들이 있었으며 조직화 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연대도 있었다. 일반 의료진들의 자발적 지원, 기업과 연예인들의 줄을 이은 기부, 건물주의 선행과 각계각층의 개인적 지원이 코로나19 대응의 연대를 보여주던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의 세비반납 지원 소식은 듣지 못했다. 진보든 보수든 여든 야든 초당적으로 재난해결에 올인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보다 공허한 구호만 외쳤던 여파가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 언론은 야당의 실책을 번호를 매겨 논조를 폈고, 트위터리안들은 야당의 실세였던 낙선자들의 이름을 줄을 세워 알렸으며, 외신들은 한국 대통령의 코로나19의 대응능력이 총선승리를 이끌었다고 타전했다. 야당은 ‘전염’의 시국을 잘못 읽었고, 국민을 과소평가했고, 현실감각이 부족했다. ‘野 30대 낙선자’들의(조선일보, 20,4.18) 분석처럼 ‘좌파독재’ ‘정권심판’을 외쳤지만 이에 공감하거나 그 심판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은 희박했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태극기부대와 뒤엉키고 전광훈과 얽히고 설화舌禍를 자초해 외면이 많았던 것이다. 이제 선거는 끝났고 코로나 확진자 수도 한 자리수를 기록하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코로나19의 대응이 세계적 모범사례로 급부상하여 국가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계기로 관련산업의 성장동력을 키우고, 위축된 경제를 되살리고, 코로나19의 장기화에 따른 기업의 대응 시스템 마련과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강조에 힘이 실린다. 기업과 정부와 정치권의 합심과 협력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세계가 평가했듯 대한민국의 저력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전염의 차단을 위한 대응과 대비는 지속적이어야 하고, 나쁜 것들과 섞이지 않으면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보여주었던 슬기로운 대처도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는 힘들지만 이번 기회에 정치권도 구태를 벗어나 현실감각을 찾았으면 좋겠다. 여야를 막론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일상에 대한 대비는 뒷전으로 두고, 공감하기 어려운 당리당략에만 치중하는 불편한 일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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