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형무소 사건>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다른 지역은 1950년 9월에 수복이 되었으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역이 험준한 남원군 산내면과 마천면, 휴천면 엄천지역에는 후퇴를 못한 인민군과 적의 치하에 종사한 각종 조직의 추종자들이 운집하고 있어 3개월간 수복이 늦어져 적 치하에 있었다.
국군이 동년 12월경 밤에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 쪽에서 쑥밭재를 넘어 추성리 속칭 어름터 광점을 거쳐 추성, 의평 마을에서 자고 그 다음날 휴천면 엄천계곡으로 가는 도중 용유담 부근에서 후퇴 못한 적의 사격을 받아 진로를 남원군 산내면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어서 그날 저녁 1950년 12월 경 다른 부대가 같은 경로로 진입하여 추성마을을 수색하고 인근 의평마을에 2일간 본부를 두고 적을 색출키 위해 인근 구양리 등구마을도 수색하였다. 이 수색을 하는 과정에 추성마을 주민 11명, 등구마을 주민 9명을 철수하면서 적치하의 추종자로 단정 연행한 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군은 이 지역주민이 인민군의 동조자로 인정, 추성마을 40여 가구를 방화, 소실하였다.
후퇴하지 못한 잔여공비가 지리산으로 퇴각하여 완전 소탕되는 1954년까지 국군이 공비소탕과정에서 지역 주민은 많은 희생과 시달림을 받았다.
별명은 하루걸이, 사촌동생 팔남매 업어 키워사랑방에서 새끼 꼬다 잡혀 가
아버지 얘기하면 눈물나서 말을 못해
마을에서 끌려가신 분이 몇 분이나 되신가요?
열한 명. 등구가 열 명인데 연고 없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뒤에 후손이 없는 사람이 하나 있어. 추성에서 열한 명 등구에서 열명 마천서 스물한 명. 한날한시에 끌려갔어.그 날짜가 언제인가요?1950년... 우리는 그때 음력을 샜으니까 동짓달 초아흐레 날.그럼 그전에는 북한군이 내려와서 먹을 것을 요구하기만 했나요?총을 갖다 들이대는데 식량을 안 줄 수가 있나. 빨갱이는 먹을 것만 탈취해 갔지 사람은 하나도 안 죽였어.어르신 형제분은 어떻게 되시나요?내 형제는 단둘인데 남동생 하나 있고.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 우리 집에 딸은 안 돼. 우리 누나 17살 묵어 죽고 여동생도 경기 나서 죽고, 그래서 우리 집에 딸은 안 돼.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떻게 사셨어요?어머님은 개가 하고 작은아버지한테 우리 두 형제가 컸지. 내가 지금 열여섯 살 먹는 사람보고 소 쟁기질 하라 하면 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근데 나는 그 나이에 다 했어. 소 부리고 농사 다 짓고 그랬어요. 작은아버지 밑에 있다가 결혼하면서 분가해서 나왔어. 아들 삼남 이녀 두고.아버님 시신은 찾으셨나요?시신은 못 찾고 그때 부산 형무소에서 사람 패 쥑여 놓고 각처에 편지를 보낸 거라. 이 사람 아파서 죽었으니 시체를 찾아 가거라 하고. 그래 작은 아버지가 가니까 한 구덩이에 누구누구누구 이름을 써서 여기 있으니 찾아가라 하는데 뒤섞여 놓으니 찾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 아버지는 손등에 새까만 점이 있었는데 그 점을 보고 찾았다 캐.
찾아서 가져 오도 못하는 기고. 지금 같으면 얼마든지 화장을 해서 가져왔을 건데 그 당시만 해도 차가 있나 저 부산 한번 갈라 하면 새벽밥 먹고 가서 차 타면 저녁에 가서 내리고 그랬을 때라. 그때가 그런 시절이라. 찾아서 가져오지도 못하는 거고 그냥 옆에다 묘를 쓰고 잘쪽한 돌을 앞에다가 하나 표시로 세워서 꽂아놨었는데 그래놓고는 나 한번 데리고 가서 보여준다 하더만은 생전 형편이 곤란하고 하니까 데려가지도 못하고 해서 다 실묘 돼버린 거라. 그때 다 그랬어.사건이 있던 날은 일상생활을 하시던 중 갑자기 끌려가게 되신 건가요?시골에는 옛날에 사랑방이 있어요. 사랑방에서 농사짓는데 보리 심어놓고 오줌 구시라고 큰 나무로 구시를 파놓고 소변을 거기다 받아서 장군으로 지어다가 보리밭에 소변을 줘서 농사를 지어 먹고 그랬어 그 시절에는. 그래서 소변 많이 보라고 무시를 동치미 담아서 먹으라고 해서 주면 먹고. 사랑방에 모여앉아서 새끼를 꼬고 망태도 만들고 짚으로 공예를 많이 했어. 뺑 둘러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는데 갑작시리 문을 확 열고 덮친 거라. 너거 전부 반동분자 아니냐고. 그 생사람을 잡은 거라 생사람을. 새끼 꼬고 있던 열한 명 몽땅 다 잡아가고 살아온 사람은 그 한 사람 밖에 없어. 나이가 젤로 어린 사람. 뭔 죄가 있것냐 하면서 살려 보내주더라 캐.사건 후 동네분들은 어떻게 지내셨나요?청년들 잡아가면서 집집마다 불을 다 질러버렸어요. 태워버려서 이사를 간 거지. 올라오다 보면 보이는 부락들마다 여기가 산 밑이 돼서 적군이 많이 올라온다고 해서 다 이주를 시켜버렸어. 금계, 도마 안봉 마천 전부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사 다 갔어. 집을 다 태워서 없는데 어떻게 살것어. 죽일 놈들이 못된 짓만 가려가면서 했어.이주 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신 계기가 있으실까요?한 몇 년 있었을끼라. 불타고 우리는 금계 부락으로 갔다가 이삼 년 있었어 거기. 할머니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가 모시고 마천소재지로 갔는데 어머니 개가하고 산림을 포개야 될 거 아이가. 내가 열세 살 먹을 때 할무이 할아버지 밥상 차려서 모셨어. 그래서 내가 15년 동안 혼자 밥해먹고 해도 아직도 밥은 잘해. 13살부터 밥해묵기 시작했는데. 내가 죽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아버지 명예회복하고 잘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하는 그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는 안되겠구나 싶고. 사랑방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동네에서 사람들 움직임은 어땠나요?잡혀가고 그 이튿날인가 동네서 그 열일곱 살 인가 하는 그 사람 큰형님이 서들어 가지고 여기서 소를 한 마리 잡아서 짊어지고 저 오도재까지 따라 간기라. 그것만 주고 소용이 있는가. 중간에 즈그 받아 묵고 사람은 안 돌려 보내주고. 아무 죄도 없고 죄라고는 괭이로 땅 파서 모심고 콩 심고 해서 농사짓고 산 게 죄다. 그거뿐이거든 사실. 빨갱이 했냐고 하면 안 했다 하면 뚜들겨 패고 매에 못 이겨서 했다 하면 뭐 했냐고 담당이 뭐냐고 하고 한 게 없어서 모른다 하면 더 뚜들겨 패. 그럼 뭐라 말해야 되것소. 사람 뚜들겨 패면 사람이 그 추운데 죽여서 하나둘도 아니고 여러 수십 명을 한 무디기에 파묻어버리고.병으로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며칠 만에 왔나요?그건 몰라요.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을 낀데 참,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부산시장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어. 거짓말을 해도 참. 국가가 백성을 죽이는건 원수지간이나 하는 짓 아니요. 나라가 백성을 존중하고 해야 잘 되는 거지. 지금 세상에야 예를 들어서 대통령이 자기 맘대로 사람을 죽이고 어쨌어 봐 그걸 그냥 놔두겠어? 지금 세상에는.동네에 이 사건을 기억하시거나 같이 얘기를 나누시는 분들이 계신가요?없어. 다 죽었어요. 살아있어도 나만침 똑똑히 들은 사람은 없어. 위에서 전해들은 얘기를 아는 거지. 나한테 그 살아오신 분이 “동생 이 다음에 내가 한말이 쓰일는지 모르니까 잘 들어놓게” 하면서 그 얘기를 하더라고. 일본 말로 “니가 뭔 죄가 있나 이 세상에는 억울한 일도 많단다, 그 말을 꼭 귀담아 두게”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러니 즈그들도 억울하게 사람들이 죽은 걸 알아. 맞아죽은걸 알아. 저거도 사람인데 그걸 모를 택이 있나. 내가 이거 조사할라고 김영삼 대통령 때 탄원서를 올렸어. 대통령한테. 물론 대통령이 이런 거를 다 읽어볼 수는 없겠지. 이게 민원실에서 다 빠꾸를 시킨 거라. 답변이 오기를 국방부로 가서 물어봐라 해서 국방부로 다시 탄원서를 올렸어. 국방부에서는 뭐라고 답변이 왔냐고 하면은 부산 정부합동 문서창고가 있으니 거기 가서 알아봐라 이러는 거라. 그래서 부산을 갔어. 사람을 하나 사서. 그 당시 서류는 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나는 학교도 못 가고 했는데 그걸 어찌 알겠어. 그래서 한문 잘하는 사람을 돈 주고 20만원 주고 사서 데리고 갔어. 가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 서류 다 불태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안 보여줘. 우리 같은 사람이 가면 안 보여줘. 이걸 명예회복을 위해 조사를 했잖아요. 먼저 우리 같은 사람들 조사를 할 때 그 감독관들이 가서 보자고 하니까 안 보여 주고 되겠어? 그때 문서를 보고 이 사람들 명예 회복시켜야 된다고 해서 명예 회복이 된 거라.그 일 이후에 작은아버지 댁에 사실 때 이야기를 조금 해주시겠어요?농사 지었어요. 학교를 가기는 갔는데 내 명칭이 있어요. 학교 하루 가고 집안일 하루하고 하느라 내 별명이 하루 걸이였어. 선생님이 하루걸이라 이름을 지었어. 공부만 해도 모자랄 판에 그랬으니 내가 뭘 배웠겠어. 맨날 공부를 디다봐도 잘하니 못하니 하는데. 기초를 잘 배웠어야 될 때 학교를 못 갔으니까 몰라 아무것도. 그래도 하루걸이한테 졸업장을 주긴 주대. 중학교 갈 형편은 못되고.
내 사촌동생들이 팔 남매라서 전부 내가 내 등허리로 업어서 다 키우고 농사도 짓고. 시골농사 아홉마지기라 카면 일거리가 너무 많아요. 열여섯 살 먹는 내가 그 일을 다 했어요. 머슴 하나 데리고 농사를 짓고 했는데. 작은 아버지는 스님이고. 전부 내가 알아서 다 하고.
할아버지가 손부나 보고 죽는다고 결혼하라고 환장을 하네. 스물일곱쯤에나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 어서 결혼을 하라고 졸라서 스무살에 결혼을 했어. 결혼해가꼬 아 하나 놓고 1964년 11월24일 내가 입대를 해서 4년간 군대생활하고 와서 분가하는데 내 혼자 대구 갔어. 돈 번다고. 목수일 배워서 평생 목수로 살다가 인자 하도 못하고. 매듭을 지을 나이가 됐어.
밥맛도 모르고 설치고 댕겼어요. 어찌됐든 먹고 살아야 되니까. 애들도 있고.자녀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나요?아니요 해줘도 몰라요. 해줄 필요도 없고. 큰아들이 지금 육십이에요. 내가 장가를 일찍 갔더니만. 할아버지가 손부 봐야 된다고 일찍 결혼했더만 증손 봐야된다고 해서 보고, 원없이 다 했구만.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뭘 어찌해서 먹고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물려줄 것도 없어. 나는 태어나서 아버지 잃고 나서 계속 그때부터 내가 벌어 내가 먹고 산 택이지. 내 사주팔자가 외로울 고자가 들었어. 외롭다 그 말이야. <연재끝>
이 기사는 증언자의 구술을 그대로 살리고자 방언을 사용하였습니다. 구술 내용 중 날짜, 나이, 숫자 등에는 구술자의 기억의 외곡이 있을 수 있으며 전체 내용 또한 증언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됐습니다.
김상록 유족
■ 이름 : 김상록■ 희생자와의 관계 : 희생자의 아들■ 생년월일 : 1943년 4월15일 / 만80세■ 성별 : 남■ 주소 : 함양군 마천면 칠선로 240■ 직업 / 경력 : 농업
함양양민희생자 희생자 정보■ 이름 : 김명수■ 생년월일 : 모름■ 사망일시 : 1950년 음력2월7일 당시 45세 가량 ■ 성별 : 남■ 결혼여부 : 기혼■ 주소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317번지■ 직업 / 경력 : 농업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