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간’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추상적이고도 현실적인 개념에 매료된 걸지도. 누구에게나 호흡하고 심장이 뛸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인간의 힘으로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결정’이 있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물론 탄생과 죽음의 과정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한 번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죽음이라면 허탈하지 않겠는가. 물론 죽음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은 안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이런 것 생각할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해라.’, ‘생각해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 데 시간 낭비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 뉴스 기사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칼부림을 당하신 분은 왜 하필 저 ‘시간’에 저곳에 계셨을까. 왜 지하차도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탈출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까. 시간을 원망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참사들. 이러한 기사들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짐과 동시에 나 또는 내 가족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시간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이기적이고 작아지는 것이다. 시간에 의해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결국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또 나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시간은 불공평하고, 세상 그 누구에게나 관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평하지 않아도 어쩌겠어. 살아가야지. 불공평하다고 찡찡댈 사람이 없고,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시련이 지나가지 않아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아.’ 어쩌겠어. 살아가야지. 탄생과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시련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지?’ 어쩌겠어. 그전까지는 살아가야지. 뭐 열여섯 살짜리가 삶과 죽음을 논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글은 그저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끝까지 살아줬으면, 버텨줬으면 하는 열여섯 살짜리의 짧은 응원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구나 포기해도 되고, 울어도 되니까 살아만 있어요. 하는 부탁이기도 하다. 힘들고 지칠 때 이런 말 들으면 좋지 않은가. 시간은 불공평하기에, 알지 못하기에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면 이기적이지만 감사하기도 하다. ‘시간은 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억만장자인 셈이고, 지금도 금은 사라지고 있다. 금을 이대로 사라지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지만, 사라져가는 금을 허망하게 지켜보고만 있을지, 남아있는 금을 가공해 반짝거리는 장신구로 만들지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나의 행동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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