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전 까지 나는 함양이라는 곳을 모르고 살았다. 지리산 칠선계곡 산행도 여러 번 했지만 밟고 다녔던 계곡이 지리산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함양이라는 지명을 들었지만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삼십대 후반 어느 여름날, 지리산 근처로 놀러 왔었다. 산이 있고 물이 있으면 어디나 아름답기 마련이다. 특히 지리산 자락이니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때 용유담 계곡을 지나게 되었다. 용유담 계곡은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합류되어 형성된 큰 계곡으로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에 있었다. 기암괴석의 화강암이 첩첩이 쌓이고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아홉 마리의 용이 놀던 못이라고 했다. 예부터 용은 풍운(風雲)의 조화를 다스리며 농경을 보호하는 비의 신으로 여겼다. 그러니 용유담은 신선의 공간이었다. 저절로 ‘와아’하는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길게 뻗은 물길 따라 호위병처럼 줄을 선 것은 하얀 바위였다. 마치 누군가가 깎은 듯 한 커다란 바위가 무심한 듯, 또 의도한 듯 그렇게 놓여 있었다. 깊은 물은 하늘의 흰 구름과 푸른 산자락을 담으며 바닥을 보여주지 않았다. 짧은 순간 용유담의 풍경 속에서 현실의 테두리가 모호해지기도 했다. 용유담 계곡이 마음에 들었다. 동화속의 한 장면 같은 집들과 푸른 나무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기암괴석·····. 그날 나는 함양을 처음 알았다. 아, 이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기도 했다. 소망 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허나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소망이 쉽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삶에는 우연이라 말하기에 모자라는 어떤 순간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끈이 인생을 끓어 당길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은 아닐까. 또 어쩌면 그것은 전생의 인연은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용유담 계곡과의 짧은 만남이 운명, 혹은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며 함양과 용유담은 낮잠속의 짧은 꿈처럼 시나브로 잊혀졌다. 그것들을 까맣게 잊은 채 다시 회색빛 도시에서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처럼 사십이라는 언덕을 막 넘으려 할 때 함양에 터를 마련할 기회가 찾아왔다. 함양에는 아무연고가 없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옷자락을 잡았다. 시골에 가면 텃세가 심하다는 둥, 젊은 사람이 시골에 가면 갑갑해서 못산다는 둥, 온갖 말을 하며 나의 결심을 무너뜨리려 했다. 함양이라는 곳이 이유 없이 좋았다. 어쩌면 그때 보았던 용유담 계곡의 풍경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스멀스멀 나를 꼬셨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도 곱씹어보면 그때의 선택이 삶에 새로운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작년여름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뉴스에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줄거리와 맛깔 나는 등장인물들의 연기 그리고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가사를 생각나게 하는 멋진 장면······. 드라마는 사람들을 늦은 밤까지 허구의 공간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드라마 인기를 등에 업고 덩달아 함양이 유명해졌다. 촬영지 중 일부가 일두 정여창 고택과 바로 용유담 계곡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문학단체에서 문학기행지를 추천하라기에 함양과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를 얘기해 주었다.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만장일치로 기행지가 함양으로 정해졌다. 후일담을 들으니 역대 최고의 만족도를 나타냈다고 했다. 용유담 계곡이 지난날 나를 함양으로 불러들였듯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함양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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