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마지막 밤, 마지막 시간이 다가온다. 그 시간에 맞추어 사람들이 종각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어묵이 준비되어 있고 까만 밤하늘로 날려 보낼 풍선도 준비되어 있다. 곧 새해를 맞이하는 타종식이 시작될 것이다. 자정이 되자 범종(梵鐘)이 울린다. 대애앵······. 묵직한 저음의 소리가 까만 허공을 가로지른다. 한밤의 적요로움이 무거운 종소리에 가볍게 흩어진다. 소리는 바람을 타고 천년의 숲, 상림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너무도 멀고 아련해서 혹시 환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범종 소리를 붙잡고 살포시 눈을 감는다. 감은 눈을 통해 굵직한 저음의 소리가 보인다. 긴 꼬리를 가진 극락조마냥 유유히 검은 빛의 공간을 자유롭게 날고 있다. 가볍게 재잘거리는 바람 사이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키웠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먼 산을 향해 아스라이 증발해 버린다. 『악학궤범』 서문에 의하면, 소리란 그 느낀 바가 같지 않음에 따라 소리도 같지 않다고 한다. 슬픈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애처롭고, 즐거운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느긋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밤의 고요 속에서 나른한 행복감에 잠겨든다. 울림이 큰 소리를 들으며 느긋함을 즐기고 있다. 우리나라 범종 소리가 유독 아름다운 것은 맥놀이 때문이다. 맥놀이는 진동수가 약간 다른 두 개의 소리가 간섭을 일으켜 소리가 주기적으로 세어졌다 약해졌다 하는 현상을 이른다. 범종은 쇠의 두께가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각 부분들이 같은 공간에서 두 가지 이상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 소리들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 맥놀이를 일으킨다. 그리고 맥놀이가 일어난 두 파동의 주파수가 완전히 같아지면 소리는 사라진다. 아마 이 같은 현상은 소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또 별다를 게 없다. 잘 산다고 하는 사람도 못 산다고 하는 사람도 곰곰이 살펴보면 살아가는 모습이 거기서 거기다.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아파하며 살아갈 뿐이다. 다른 듯 하면서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살아가기에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맥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타종식이 있기 전, 종각 앞에서 여성 합창단인 나는 다문화 새댁들이 함께 ‘군민가’를 불렀다. 입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세찬 겨울바람 가운데서 한목소리처럼 노래를 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을 때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웃었다. 그런데 ‘다문화 새댁’이라니······, 내가 해놓고도 어딘지 모르게 말이 이상하다. 그녀들도 나도 같은 군민인데 다문화라는 말로 그녀들을 격리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문화’라는 오직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말이다. 한 사회 속에 여러 민족이나 여러 국가의 문화가 섞여 있는 것을 뜻한다. 그 말이 처음 생겼을 때는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았다. 아마 처음 의도는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민족 사람과 결혼해 이룬 가정을 배려하여 만들어 졌을 것이다. 분명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편을 가르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허나 결과적으로 편을 나누어 버린 모양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 말이 존재하는 한 그녀들은 언제나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두개의 파장이 하나가 될 때 맥놀이는 사라진다. 우리는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다른 파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저 멀리 바다건너 시집온 그녀들도 나도 그냥 사람일뿐이다. 그러기에 ‘단일민족’이라는 말도 ‘다문화’라는 말도 이제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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