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평교회 김희수가을이 깊다. 바람이 투명하다. 교회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 두 그루. 감나무는 꼭대기에 까치밥 몇 개만 남겨놓고 온전히 자유롭다. 며칠 전 주렁주렁 열린 감을 땄다. 눈이 부시도록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홍빛 선명한 감이 보석알처럼 박혀 있었다. 젊은 집사님이 감나무 위에 올라가고. 나이 드신 장로님은 긴 장대로 감을 땄다. 수령이 40년은 넘었다고 하니 얼추 나와 나이가 비슷하다. 감나무는 봄부터 여릿여릿 새싹을 틔워 냈다. 그렇게 작은 잎들이 점점이 파란 하늘을 수놓아 짙은 녹음이 되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온갖 새들도 앉았다 가고. 나그네도 가던 길 멈추고 쉬었다 가고. 땀 흘리며 밭 매던 아낙도 더위 피해 잠깐 한 숨 돌린다. 소낙비 그은 뒤 뭉게구름 피어오르면 매미가 울어 재끼고. 모진 바람 불며 폭우에 시달려도 꿋꿋하게 서 있었다. 달이 기울고 별빛이 스러지며 온 세상 환하게 아침 햇살이 퍼지는 하루하루......그렇게 숨막히게 한 여름을 보내고 나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여기저기 노오란 감 열매가 보인다. 여름내 보이지 않던 감들이 가을이 되니 비로소 노랗게 드러난다. 여름 내 초록 잎사귀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저 많은 감이 다 어떻게 숨어 있었던 걸까?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자신을 가꾸고 진심을 다하면. 때가 차매 그렇게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저절로 드러나는 법인가 보다. 가을이 깊어지면 울긋불긋 감나무 잎들도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한다. 노란 열매와 함께 감나무는 불타오른다. 한송이 커다란 꽃이다.이렇듯 감나무는 찬란한 노년을 보낸다. 넉넉하고 느긋하고 풍성한 노년. 마지막 생을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물들이고 아무 미련 없이 한자락 바람에도 누런 잎을 다 벗어 던진다. 감나무에게서 나는 노년의 초상을 본다. 한 여름 뙤약볕과 천둥과 폭우와 바람과 깜깜한 밤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풍요로운 노년 말이다. 떫은맛이 가신 홍시처럼 몰랑몰랑 해지길. 나의 남은 생이 저러하길 간절히 소망한다.이제 감도 다 따내고 빈 몸이 된 나무여! 이제 당신은 그늘조차 투명하고. 바람 한 점 걸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모두 드러내놓아 거칠 것 없는 참 자유로 숨 쉬는 감나무여! 헐벗은 그대에게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느낍니다. 이제 곧 닥칠 매서운 겨울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롯이 뜨거운 속마음으로 부활의 봄을 기다리는 당신에게서 오늘도 나는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