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순씨함양문인협회(회장 문복주) 회원인 황정순(64세)씨가 월간 수필문학에 초회추천을 받고 10월호에 '은 숟가락'으로 추천완료 돼 한국 수필문학가로 등단하게 됐다.현재 지곡 주암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황정순씨는 함양출생으로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을 수료하고 여울문학회회원. 함양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수필 '은 숟가락'은 너도나도 가난했던 그때. 9남매의 추억담이 옛이야기처럼 흘러나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처럼 실감난다.황정순씨는 등단소감을 통해 “수필공부는 나 자신의 닫힌 마음. 갇힌 생각을 열고 펼쳐지게 해 주었다"고 전한다.다음은 월간 수필문학 10월호에 실린 수필 '은 숟가락' 은 숟가락 -황정순 대전가는 첫차를 타기위해 아침 산길을 걸어 나오는데 먼 산은 운무에 능선만 보이고 눈앞의 푸른 소나무들은 싱그러움으로 다가온다. 목적지 단양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넘었다. 형제 여섯 명이 만나자마자 반가움에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각자 자기 이야기에 취하여 싸우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높아진다. 모두 서울에서 30-40년째 살고 있는데도 사투리가 방안을 채운다. 형제는 어린시절로 돌아가 떠들고 열을 올린다. 초등학교 시절 “00 동생이구나” 하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큰언니가 입었던 옷을 넷째인 내가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 옷보다는 언니의 옷을 물려받아 입는 일이 많았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명절이 다가오면 아버지는 도시의 큰 시장 포목점에서 천을 사왔다. 그때는 기성복이 없어 집에서 재봉틀로 어머니가 옷을 만들었다. 똑같은 색상의 치마저고리. 우리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쌍둥이 같다고 불평을 하기도 하였다. 집안에는 우물이 있다. 우당탕탕 소리도 요란하게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다. 양은 세숫대야는 늘 찌그려져있고. 등교하는 날 아침엔 미장원에나 있을법한 대형거울 앞에 우르르 몰려가서 머리를 빗었다. 밥상 앞에 앉으면 때론 기름을 바르지 않고 구운 김을 몇 장씩 나누어 주었다. 생일 명절 등 특별한 날에는 어머니는 기도를 한다. 아홉 명(딸 여섯. 아들 셋)의 자식이름을 하나 씩 부르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항상 시간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기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김은 꽉 쥐고서 맛있는 반찬이 있나 없나 살피면서 기도하는 척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형제 많은 것이 불만인 때도 있었다. 내 몫이 적어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홉 개로 쪼개진다고 생각하니 모든 현실이 성에 차지 않았다. 형제가 적은 친구. 특히 조용한 집 무남독녀의 친구가 너무나 부럽기도 했다. 언니들은 늘 어린 동생을 업고 다녔다. 친구하고 고무줄놀이 할 때도 업고 했다고 한다. 하나가 감기에 걸리면 돌아가면서 앓는다. 그때마다 언니가 어머니 대신 동생을 병원이나 약국에 데리고 간다. 겨울에는 땔감을 아끼느라 한 방에서 잤다. 우리는 서로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소란 속에서 잠이 들었다.결혼과 함께 부산에서 생활을 하면서 첫아이를 출산하였다. 지금은 산후조리원이 있지만 그때는 없었다. 시어머니도 안계시고 친정어머니도 도와줄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나는 몸이 약해서 젖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돼지 족발도 사 오고. 동생이 자기 일을 미루고 우리 집에 와서 한 달 동안 산후조리를 도와주었다. 서울로 이사 올 때도 셋째 언니 집 동네로 왔다. 집을 사거나 옮길 때에도 언니들은 부모역할을 해주었다. 아이 셋이 학교 다닐 적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큰아이는 미대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하고.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 셋째는 고등학교 1학년인 때에는 참 힘들었다. 큰애는 화실과 학원 등 방과 후 과외를 하기 때문에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때는 남편도 대학원을 다녔다. 어느 날 아침 큰딸이 그림물감을 사야한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지갑에는 한 푼도 없는데 저녁도 아닌 아침에 누구한테 꾸어야하나. 참 막막했다. 할 수없이 늘 지나치면서 인사를 나누었던 집 앞 길거리 채소가게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고 빌려서 딸에게 주었다. 아침에 돈 빌린다는 게 정말 괴롭고 구걸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언니들에게 나의 형편을 이야기 했다. 그 후 큰언니를 통해 형제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마치 은행처럼 도와주었다. 세월이 흘러 형제들은 이제 모두 제자리를 잡아 살고 있다. 그동안 생일날에는 모여서 축하도 해주고 가끔 여행도 함께 했다. 25년 전 형제가 외국여행을 한 일이 있다. 형제가 뭉쳐서 다니는 모습이 부럽고 참 보기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씩 형제가 모임 겸 여행을 다니고 있다. 단양호에서 배를 타고 흐르는 물길을 보니 어려웠던 시절도 저 물과 같이 흘러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음도 세월과 함께 흘러갔다. 한편으로는 그 많은 형제들을 위해 고생하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이 밀물처럼 가슴에 파고든다. 부자 집에 태어난 사람을 보고 흔히들 “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나온 사람”이라고 한다. 친정은 부자 집은 아니지만 대신 아홉 명의 형제가 “은 숟가락”이 되어 우리 9남매 입에 물려 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부모님 상에 은반상기 밥상이라도 한번 차려 올리고 싶은데 이제 그분들은 그 상을 받으실 수가 없다. 이런 것이 인생이구나 싶으니 흐르는 물살이 자꾸 흐려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