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복주 시인의 안녕하세요 함양-4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봄은 겨울 동안 많은 생각과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가 못내 참지 못하고 기어이 눈발이 끝나기 무섭게 산을 건너 냇가를 건너 달려오는 것이다. 산천은 봄의 숨찬 헐떡임으로 환희의 소리로 가득하다. 함양의 봄은 소리로 온다. 남도로부터 봄이 온다고 난리다. 도대체 봄이 누구길래 봄이 온다고 이 난리법석일까? 제주도에 유채꽃이 만발했다느니 남해 매화마을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느니 봄이 오고 있다고 여기저기 언론 매체가 성급히 봄소식을 전한다. 그래서 나는 창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아예 대문을 열고 나서서 봄이라고 하는 그 봄이 도대체 누구인가를 살펴보았다. 또 도대체 그 봄이 어디쯤 오고 있다는 것일까 살펴보았다. 과연 사람들이 그럴 만 했다. 오고 있다는 그 봄은 아주 멋진 아리따운 처녀였던 것이다. 봄처녀. 그것도 산들산들한. 그러니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이 난리다.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나는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망원경을 꺼내 와 멀리 저 하늘 너머를 살펴보았다. 우와! 봄처녀는 그야말로 살랑살랑 찰랑찰랑 산뜻한 8등신 미녀로 싱그런 자태로 새풀옷을 입고 오고 있었다. 나의 눈알이 퉁하고 빠져나가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으로 얼굴을 반쯤 살짝 가리고 너울까지 썼으니 알싸한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아주 멋진 그것도 금도 아닌 은도 아닌 우아한 모습만큼이나 초롱초롱한 진주이슬 신을 신고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들 난리법석을 치며 달려나가지 않으랴!(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온다는 사실이다. 꽃다발이란 사랑스런 사람에게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아니면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아름다운 꽃들만으로 꺾어 만든 지상 최대의 선물이 아닌가. 그 꽃다발을 들고 온다니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꽃다발을 받을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행여 내게 오는 게 아닐까? 설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내심 나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기대 해보는 것이 죄인가.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번 나가 물어 볼까? 나를 찾아오시는 게 아니냐고?(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봄처녀. 그녀가 내게 와서 말한다. “네. 저 멀리서 당신을 찾아 왔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 달려 왔어요. 이 꽃다발을 받아 주세요” 이 얼마나 감격적인 환희의 만남인가. 시인 이은상 선생님은 나를 찾아온 <봄처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님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사람들은 봄을 기다린다. 왜 봄을 기다릴까. 그것은 만물이 소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꽁꽁 얼었던 대지가 풀리고 웅크렸던 작은 생명들이 보이지 않게 내공으로 조금씩 준비해오던 생명을 대지의 밖으로 내밀어 본다. 그래서 견딜 만하다 싶으면 한해의 생명을 허공에 과감하게 던진다. 그러나 가끔은 실수로 아니면 시샘하는 동장군의 무리가 있어 혼절하게 꺾일 경우도 있다. 이른바 꽃샘추위라고 하는 것이다. 꽃이 피어나는 것조차 시샘하는 예쁜 우리말. 이렇게 봄은 귀엽게 혹은 피 터지게 싸우며 남쪽으로부터 북으로 조금씩 올라온다. 동장군은 바늘구멍도 들어갈 수 없는 냉혈 장군이다. 꽃님은 어머. 무서워라!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는 나약한 꽃처녀! 하지만 살랑살랑 동장군을 녹여 이윽고 세상은 꽃세상이 된다. 정말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 알려는 사람은 함양 오일장에 가보면 안다. 계절이 어떻게 지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오일장에 가보면 안다. 또 사람 사는 세상을 보고 싶은 사람은 오일장에 가보면 안다. 나는 장이 서는 날이면 으레 장터에 간다. 장에 가면 살맛이 나기 때문이다. 함양의 오일장은 2.7장이다.(인월은 3.8장이고 거창은 1.6장이다.) 2일과 7일에 제일약국과 동해물약국이 있는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큰 거리 작은 거리를 따라 곳곳 난전에 장이 펼쳐진다. 꼬부랑 할매들이 꼬부랑이 앉아 동네 텃밭에서 성급히 뜯어온 봄을 팔고 있다. “보이소. 봄 좀 사 가지고 가이소. 봄에 봄을 파니 봄을 사 가소. 가을이나 겨울을 파는 곳은 이제 끝났으니 내년에 오소” 할무이들은 땅바닥에 사과궤짝 위에 오물오물 한 무더기씩 봄을 올려놓고 팔고 있다. 나는 봄이 신기해 할무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봄을 들여다본다. 냉이 달래 돌나물 곰취 노지시금치 취 햇쑥 돌미나리... 머위순도 있다. 며칠만 있으면 봄의 왕자 두릅이 수북히 쏟아져 나올 것이다. 가죽나무순도 단풍취(개발딱주)도 참두릅도 옻순도 가득하게 나올 것이다. 고향 시골된장을 한 숟가락 푹 떠서 뚝배기에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두부를 넣고 양지바른 밭이랑에서 캐 온 달래 한 움큼 씻어 넣으면 온 집안에 가득 퍼지는 상큼한 봄내음. 구수한 저 된장국 내음새. 흠_ 흠_ 어찌 잊겠는가. 시장에서부터 코를 벌름거려 본다. 신기하다. 이 나약한 풀들이 겨우내 땅 속에 숨어 있다가 봄이 온 걸 어찌 알고 고개를 내밀어 세상 구경을 하다니 자연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다. 이렇게 함양의 봄은 오일장 할매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다. 함양은 청정 산골이라 이런 야생 나물들이 지천에 있어 직접 캐먹을 수도 있고 사 먹을 수도 있으니 복 된 고장에서 사는 게 틀림없다. 하우스에서 약 치고 비료 주고 키운 무맛의 나물은 먹어야 독이다. 그러나 함양의 산나물들은 그야말로 약이다. 거짓 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진짜 봄을 파는 것이다. 할매들이 달래를 팔면 봄이 왔구나. 고추 오이 호박 모종을 팔면 여름이 가까워 오는구나. 감자 고구마 들깨 시금치 상추 모종들을 팔면 아. 여름이구나. 아. 가을이구나. 할매들이 아무 것도 팔지 않으면 아. 겨울이 왔구나를 나는 느낀다. 계절을 팔고 사는 함양의 오일장은 정겹고 신기하기만 하다.나는 다시 봄을 따라 가본다. 목화예식장 쪽으로 묘목이 한 가득 쌓여 있고 뚱뚱이 아저씨 부부가 분주히 왔다 갔다 한다. 또 화장실 있는 건너편 주차장 쪽으로 가면 효산마을에 사는 키 큰 키다리 아저씨가 전정가위를 들고 벌써 묘목을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다. 그럼 그렇지 봄이 오긴 오는 모양이군. 키다리 아저씨는 딱 3.4.5월 석달만 장사한다. 30년 묘목장수를 했다는 아저씨는 각종 과수나무 묘목을 눈 코 뜰 새 없이 판다. 청매실 홍매실 사과 오가피 밤 감 배 포도 앵두 살구 보리수 오디 무화과. 세상의 열매 달리는 모든 나무 묘목은 다 판다. 또 각종 꽃나무를 다 판다. 진달래 철쭉 수사나무 오죽 느릅나무 천리향 호랑가시나무 황금송 반송 능수매화 동백 줄장미... 그렇게 봄의 나무들을 다 팔면 키다리 아저씨는 사라진다. 다음 해 봄이 되어야 키다리 아저씨는 나타난다. “시인 선상님 글과 얼굴은 신문에서 책에서 자꾸 보는구만요. 잘 지내셨나요?” “아. 예.예. 키다리 아저씨. 잘 지내셨지요?”정말 산 너머 남촌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불어와 꽃을 피어나게 하고 생명을 솟아나게 하여 세상을 여는 것일까?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가을은 교양 있게 우아한 품위를 지니고 우수와 함께 귀부인으로 오지만 봄은 지리산의 산골소녀처럼 하얀 새풀옷을 입고 깔깔깔 웃으며 산들산들 춤추며 온다. 혹은 서상. 서하의 사과나무 배나무 과수원집 딸 순이로 상기된 볼을 붉히며 찾아온다. 봄은 겨울 동안 많은 생각과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가 못내 참지 못하고 기어이 눈발이 끝나기 무섭게 산을 건너 냇가를 건너 달려오는 것이다. 산천은 봄의 숨찬 헐떡임으로 환희의 소리로 가득하다. 함양의 봄은 소리로 온다. 졸졸졸졸. 눈 덮힌 계곡 골짜기 아직도 서슬 푸른 얼음장 밑으로 아랑곳없이 그리움이 숨어 오는 소리. 기쁨의 노래로 오는 소리. 졸졸졸졸. 그 소리에 겨울잠은 조금씩 뒤척이며 깨이고 봄이 들어서는 입춘(立春).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우수(雨水). 개구리가 놀라 잠에서 깨어 펄쩍 뛰어 오르는 경칩(驚蟄)에 봄은 아차! 하며 옷을 차려 입지도 못한 채 산으로 강으로 달려나간다. 봄비가 오면 제법 개울가에 물이 불어 힘차게 계곡 바위를 두드리며 달린다. 겨우내 보이지도 않던 텃새들도 바삐 돌아다니고 짹짹거리며 창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까마귀도 가끔씩 까악. 까악 헛기침한다. 멀리서 경운기 발동소리가 들려온다. 크릉크릉크르르릉.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김씨 할아범일 것이다. 땅이 풀리기도 전에 나가서 이것저것 작년에 정리하지 못한 검불과 비닐들을 치울 것이다. 하우스 주변에서 또는 양지바른 둔덕에서 소리가 들린다. “철이 엄마- 여기 냉이와 달래가 한 가득이야. 쑥도 엄청나게 많아. 이리로 와서 나물 캐-” 봄을 부르는 아낙네들의 소리가 새소리처럼 들린다 봄을 기다리는 당신먼저 동면의 잠에서 깨어나세요또 함양의 봄은 내음으로 온다. 흠흠 코를 벌렁거려 보라. 물기 젖은 알 수 없는 풋풋한 물내음이 맡아진다. 숲에서 묻어오는 푸릇푸릇한 풀내음. 거리를 지나다보면 나도 모르게 향하는 화원의 꽃내음. 찬바람 속에서도 섞여서 불어오는 생명의 내음.그러나 함양의 봄은 먼저 마음에서 와야 봄이 온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나의 순이. 봄이 와도 그냥 지나가 버린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다. 봄은 진정 당신의 마음에서부터 온다. 봄을 기다리는 당신. 먼저 깊은 동면의 잠에서 깨어나세요. 게으른 정신을 깨우세요. 칙칙한 창가의 커튼을 걷어 버리고 창문을 활짝 여세요. 봄내음 가득 실은 산뜻한 공기로 방안을 가득 채우세요.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고 호수로 물을 쏘아 올리며 집안 대청소를 해보세요. 집 앞도 깨끗이 닦아 보세요. 봄비라도 온다면 겨울에 묵었던 온갖 화분을 마당이나 바깥 베란다에 내어놓고 봄비에 흥건히 젖도록 내버려두세요. 당신도 우산을 쓰지 말고 그대로 대지의 봄비를 맞으며 거리를 걸으세요. 가까운 카페에 가서 친구를 불러내어 수다떨며 차 한잔하세요.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 던지세요. 지갑을 열어 밝은 색깔의 옷 한 벌도 사보세요. 그 옷을 입고 아이는 하루쯤 내동댕이치고 남편과 함께 1박2일 여행을 떠나 보세요. 전남 월출산도 좋고 남해 보물섬도 좋고 거제 외도도 좋아요. 남편과 오랜만에 손잡고 떠났다 오세요. 맛있는 전라도 한정식도 좋고 싱싱한 남해바다 회도 좋습니다. 그래야 봄이 옵니다. 봄처녀가 됩니다. 그래야 운현궁의 봄도 오고 함양의 봄도 오고 당신의 봄도 옵니다. 이것이 봄이 오는 순서입니다.<문복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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