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의원 문정섭60년대 담배농사는 우리군 농사 중 잠업과 함께 주 소득원 중의 한 작목이었다. 선친께서는 담배를 매년 재배하셨고 건조 후 공판하는 날에는 필자도 늘 동행. 현재의 함양읍 교산리 엽연초생산조합까지 함께 다녔다. 그리고 이때는 집에서 재배한 아편을 조금씩 문종이에 싸서 검사원들한테 선물하기도 했다.담배는 누에와는 상극이라 담배 밭 인근의 뽕잎을 따다가 누에에게 먹였다가는 잘 자라던 누에가 병들어 죽게 되니 향상 조심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담배 밭과 뽕밭은 거리를 멀리했다. 재래종 담배농사는 병충해가 문제였는데 부드러운 속잎에는 계속하여 진드기가 번졌다.당시만 해도 적당한 농약이 없어 손으로 비벼 죽이기도 하였고 파리나 모기약통에 약을 넣어 입으로 불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담배를 말릴 때는 잔디 위에 이슬이 없어진 오전10시 이후가 되어 잔디밭에 늘었다가 산그늘이 지고 이슬이 내리기 전에 걷어야하므로 2명이 1조가 되어야 작업이 가능했다. 60년대 초부터 철선과 비닐이 공급되어 철선에 매달았던 담뱃줄을 한쪽으로 밀쳐 비닐을 덮어 주는 작업은 일손을 한층 줄여 주었다.64년도 필자의 집에도 황색종인 버레종이 보급 되였다. 잠실을 허물고 그곳에다 흑벽돌로 담배 건조장을 신축하였다. 버레종은 황숙한 잎을 따서 건조장 안에 걸어놓고 불을 넣어 건조시키는 방법이다.이때 나무에 불을 지펴 건조 시까지 계속 불을 넣어줘야 하는데 일단 부엌 안이 발갛게 달은 후에는 생나무를 베어다 넣어도 잘 탔다. 그래서 야간에도 밝은 달빛이 있는 날은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밤새 불을 넣곤 했다. 이때는 학교도 장기결석을 해야만 했다. 가끔 문을 열고 건조실 안에 들어가 보면 내부온도가 96∼98도였다.잠깐만 들어갔다 나와도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돼 버렸다. 요즈음의 참숯굴방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건조장 안을 들락거리고 나면 기운이 없고 온몸이 나른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건조장 안은 고열뿐 아니라 독한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칫하여 매어 놓은 담배 잎이 하나라도 가열된 온돌 위에 떨어지는 날에는 건조장 전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재만 남고 마는 형편이라 항상 조심도 되었다.우리나라 흡연인구는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비하여 잎담배 경작면적은 매년 축소되고 있어 우리의 농업소득이 타 작목으로 많이 전환되었음을 실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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