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복주 시인의 안녕하세요 함양 - 1저는 오래전부터 함양을 사모해 온 문복주 시인입니다. 저 혼자만의 짝사랑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구보다도 함양을 사랑합니다. 내 사랑의 마음을 함양에게 고백하기 위해 그대 창가 앞에서 매주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드리려 합니다. 제발 창문을 열고 내 사랑을 받아주시고 사랑의 입맞춤을 던져 주세요. 다볕골에 살고 있는 선조 할배 할무이 아부지 어무이 숙부 숙모 고모 이모 조카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이런 저런 사람의 살아가는 이야기와 세상이야기를 기웃기웃 살펴보고 소식을 전하고 사랑을 나눈다면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세상이 그려지지 않겠어요? 또 멀리 떠나 살고 있는 출향 가족. 친지들에게 고향소식을 보내드리면 그 모든 추억이 살아나 지치고 힘들던 일상생활이 산양삼을 먹은 것처럼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지 않을까요? 다볕골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사는 모습을 돌이켜 봄으로서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거짓이었나를 살펴보게 되겠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삶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빵도 중요하고 밥도 중요하고 꿈도 행복도 사랑도 다 중요하니까요. 천년의 숲 ‘상림(上林)’에 가면 함안루 곁에 기와로 지어진 공연장이 있는데 <다볕당>이라 써 있습니다. 다볕당이 무엇을 나타내는 뜻일까? 이곳이 처음인 나는 많이 궁금했었지요. 무엇을 모를 때 골똘히 100번을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한다고 하기에 100번 읽어보았더니 정말로 그 뜻이 터득되어 나 혼자 키킥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다할 함(咸)의 다와. 볕 양(陽)의 볕을 합쳐 다볕 = 함양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었음을 알고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순수 우리말 지명이 있을까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습니다. 따스한 햇볕이 많은 드는 곳. 함양 다볕은 얼마나 뜻이 예쁜 우리말일까요. 광주도 그렇지요. 빛 광. 마을 주로 광주를 빛고을 마을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니 함양도 다볕마을이라 부르면 더 멋지지 않을 까요. 이런 우리말 지명을 많이 되찾아 써야 할 텐데 아쉬움이 많습니다. 함양은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 일컬을 만큼 선비가 많고. 지조 높은 학문이 깊은 고장이었지요. 지금은 경상도라 전라도를 경계하고 호남고속도로와 대진고속도로가 열십자로 만나는 남도 교통중심 요지에 위치한 곳으로 농산물 물류단지로 부각되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함양은 민족의 어머니 산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제일문이라는데 큰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 지리산 이야기는 다음에 차차 더 많이 들려드릴게요. 내가 사는 곳은 함양군 병곡면 원산리 95입니다. 함양 읍내에서 차로 20분. 걸으면 2시간 걸리지요. 병곡 원산(원티) 마을. 이곳이 산골마을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호리병 모양으로 지세가 형성되어 항아리 병(甁) 계곡 곡(谷)으로 병곡이라 불렀다지요. 그 호리병 안에 마을이 들어앉아 있으니 어떤 큰 난리에도 재난을 받지 않고 마을이 아무 탈 없이 수백 년 잘 살아 왔다고 정감록에도 언급된 명당의 마을이라 하더군요. 2000년 초 제가 이곳에 살집을 짓기 위하여 땅을 사러 왔을 때는 비포장도로였지요. 옥계 길로 해서 먼지 풀풀 날리는 꼬불꼬불 산골길을 걸어갔지요. 진달래 철쭉 패랭이꽃 샛노란 갓 붉은 꽃들이 피고 지며 한들거리는 길을 걸어걸어 산간마을을 오를 때 그 적막함과 호젓함과 가벼움과 시원함을 느껴 보셨나요? 푸른 하늘과 초록의 산과 맑은 산소통 공기를 들어 마시며 걸을 때 그 기쁨과 희열을 한번이라도 맛 보셨나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원시의 숲 그대로였습니다. 나에게는 생전에 가져 보지 못한 생애 최고의 날이었지요. 그 느낌 기분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옥계저수지를 지나면 40여 가구의 산골마을이 나타나고 다랭이논이 산비탈을 타고 산으로 산으로 가파르게 오르고 멀리 대봉산(괘관산) 봉우리가 보이고 사람은 하나도 안보이고 흰둥개가 나를 한없이 쫓아오고...그래서 수첩에 종이를 한 장 북 찢어 시 같지 않은 시 하나를 끼적여 보았습니다. 이주 초기시대의 시라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생생하기는 합니다. 우리는 문화인이니까 앞으로 이쯤의 시 한편 쯤은 곡해 없이 감상하고 읽어 주리라 생각합니다. ▲ 외로운 염소막과 상징의 세계병곡 원티 마을은 아름답다산과 계곡 논두렁 햇볕 사이사이로 봄날이 지나가고외로운 정자(亭子)는 춘곤증에 벌써 졸고 있다오토바이 타고 하루 한번 싱긋 웃고 가는 우체부산 고개 세 번 오르면 왔는지 갔는지 모르는 먼지만 피우는거만한 버스 기사 아저씨도 졸고 우리 마을 귀농하신 노가리 선생 이게 말로만 듣던 송이버섯이라요? 꼭 거시기 닮았네독거촌 약초 아저씨 무니 무니해도 된장에 머위 보쌈 이게 몸에 억시로 좋은 거라요호리병 목줄을 타고 내리는 병곡에서는먼저 사람이 하나 같이 순수해 덩달아 당당해 진다시인 아저씨. 제발 앞으로는 쐐주 그만 하시고요 병곡의 멋진 시 하나 써 주시라요아직도 순정을 곱씹는 얼얼한 순경아저씨 풋사랑 아내와 같이 마을을 지킨답시고 졸고 있다그래서 낮엔 풀벌레 소리. 밤엔 개구리 소리마저 무법으로 아우성친다순경 아저씨. 잠 좀 자게 저 놈들 좀 묶어 주이소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원시에서 벌레를 지키는 우리 마을 순경 아저씨시인은 오늘도 술 한 잔 먹으며 산골에서 저 혼자 비분강개 한다 자고로 순경이란 마을의 풀벌레 하나라도 저렇게 초지일관 지키는 것이여산 그림자도 지쳤는지 늘어져 산마을 어귀에 기대어 있으면여우비가 꼬리를 감추고 잠깐 들렸다 괘관산으로 넘어 간다 알싸한 더덕. 두릅. 도라지 냄새가 마을을 점령해 버리고 병곡은 지금 적막강산이다 <병곡 원티 마을은 아름답다 - 문복주. 전문>원산마을은 300∼400년전 조선시대 처음 전(全)씨가 들어와 살다가 그 후 경주 김씨(계림군파)가 임실에서 들어와 마을을 이룬 김씨 집성촌입니다. 동네 입구엔 이 마을 시조로 벼슬을 지낸 김공위이동유적비가 두 마리 사자상과 함께 서 있지요. 지금도 11월 3째주 휴일이면 그 후손들이 모여 매년 시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20여년간 마을이장을 한 경주 김씨 12대손 김경돌 전 이장은 71세의 나이에도 이 마을의 어른으로 모든 일을 주관합니다. 마을회관 마이크는 그의 훌륭한 홍보 비서실장인데 그저 일만 있으면 새벽이고 늦은 밤이고 가릴 것 없이 막무가내입니다. 생방송을 중계해 봅니다. “아. 아. 마이크. 마이크. 에. 내일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김씨 종친회의 가장 중요한 대사의 날인... 날이라... 전국 각지에서 경주 김씨 후손들이 어마어마하게 찾아오기로 되어 있어요. 저 거시기 조카 며누리! 옆에서 거 조용히 좀 못해!! 나가! 나가! 에. 그래 설라무니 각 종친께서는 너나 가릴 것 없이 전부 마을회관 앞으로 지금 즉시 나와 마을 전체를 청소하시고 음식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어명이라고 거역하랴! 잘못했다가 종친 어른의 눈 밖에 나 파문 선고라도 내려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 원티에서는 아직도 박경리의 토지처럼 가문의 힘과 종친 서열의 힘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의 출세는 곧 가문의 영광으로 온 동네잔치가 되지요. ▲ 천상하애도(天上下愛道) -내가 그려본 집 설계도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00년 초쯤 선조 경주 김씨가 남덕유산 자락 깊은 산골 골짜기 원티에 이주해 와서 한집 두집 집성촌을 이루게 됩니다. 산골에 무슨 생업이 있었겠습니까.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깊은 산골이라 약초를 캐고 각종 나물을 뜯고 저잣거리에 나가 팖으로써 얼마간의 경제를 얻었지요.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은 산 가득 있는 참나무. 소나무를 베어 땔감나무를 패어 시장이나 읍내 부유한 집에 대어 줌으로써 주요 경제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또 참나무를 숯터에서 참숯으로 구워 지게에 가득 지고 30∼40여리를 반나절 걸어가 시장에 내다 팔아 자식들을 키워나갔습니다. 지금도 이 숯터가 지소 독거촌 위에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엔 화전민 동네라고 불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니 그 옛날의 산골 생활이란 굉장히 힘든 생활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100여 가구가 살았다니 산골마을로서는 꽤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하나 도시로 떠나고 산골 농촌이 다 그렇듯 늙으신 부모님들만이 남아 선대의 땅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곳에 살면 저절로 느껴지는 것인데 농촌은 어디라고 할 곳 없이 다 그렇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인사 잘하고 말 잘 들어 주고 조그만 음식이라도 나누고 하면 “그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이야” 하고 좋아하지요. 그러나 인사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온 동네에 금방 소문납니다. “그 사람 안되겠어. 아주 시건방지더구만” 그거야 어디 다른 시골은 다 안 그러겠습니까? 원산마을에서 사람을 부르는 이곳 호칭이 참 친근감이 가고 인간적인 것 같아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도시에서야 김사장 이선생 박회장 안과장 어마어마하게 부르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진주댁 안의댁 옥계댁 통나무집 백구네 알밤댁 액기댁등 그 집의 특징이나 원 출신 고향으로 부르는 게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야무치 아지매 이름은 아주 생소하고 시골적 입니다. 약초를 캐러 다니는 할머니인데 아주 유명인사라 KBS MBC SBS 등 안 나온 데가 없는 대 인기스타입니다. ▲ 산림경영모델 숲십년 전까지 만 해도 비포장도로였다니 얼마나 산골이었는지 짐작이 가나요? 지금도 버스가 하루에 세 번 밖에 다니지 않으니 (아침8시. 오후3시. 저녁 7시) 신기하지 않아요? 그 만큼 도시화가 되지 않고 발전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개인적인 나의 생각이라 미안합니다만 나는 이런 것이 어쩌면 더 좋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고 불편하여 이 산골마을의 아름다움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원티 산골마을의 아름다움은 덜 문명적이고 더 원시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산에는 호랑이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형상을 한 높은 산이 있는데 가을 단풍이 한참 들면 그야말로 금수강산입니다. 아침방송 시작될 때 애국가가 나오고 설악산의 단풍든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바로 그 모습을 실제로 내 눈앞에서 보고 서 있으니 도시에서만 평생 살아 온 나는 부르르 떨며 감격에 감동을 낳았지요. “그래. 신이 점지해 주신 땅이야. 무엇을 주저하랴!” 망설임없이 땅을 사서 집을 지었지요. 그것이 벌써 10년이 가까워 옵니다.현대인들은 좋은 곳을 가만 두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연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자연주의에 찬미를 노래 부르기 시작하자 원티 산골마을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곳 사람들은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와. 우리 마을이 아름답기는 아름다운 모양이여.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관광버스로 매일 한 두 대씩 들어오는 것 보니 좋긴 좋은 모양이여.”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 물가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내가 이 곳에 이사 온 이후에도 10여 집이나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텃밭을 일구며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평생의 꿈이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산비탈 곳곳엔 까만 방목 염소떼가 몰려다니며 풀을 뜯다 멈춰 서서 나를 한참이나 쳐다봅니다. 그들은 할아버지 염소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고 경계하며 사람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산비탈 위로는 산림경영모델 숲이 10만평에 거쳐 각종 과수나무와 약초나무가 식재되어 있습니다. 10년만 지나면 기막힌 과수 휴양림이 되겠지요. 마을 북쪽으로 오르다 오른 쪽으로 접어들면 대봉계곡을 따라 계곡물이 사시사철 콸콸콸 흘러내리지요. 계곡을 따라 원시의 숲을 두어 시간만 오르면 대봉산(1250m)과 천황산이 있고 진달래밭을 지나 빼빼재를 지나면 백운산(1156m)이 있으니 천혜의 좋은 곳입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오히려 한적하게 산행할 수 있어 좋습니다. 등산객들은 남에게 쉬쉬하며 저희들만 몰래 찾아온다고 하지요. 사시사철 계곡물이 흐르고 고사리 두릅 곰치 취나물 개발딱지 가죽나물 엄나무 옻나무 순 등 산나물이 앞산 뒷산에 있으니 내 게으름을 한탄할 뿐이지요. 오늘도 원티 산골마을의 아름다움이 사계에 거쳐 나타나는 신비를 나는 바라봅니다. 고로쇠물이 오르고 난 다음 봄에 갖가지 꽃들이 피고나면 나무의 새순이 올라오는데 그 새잎의 순록은 너무 깨끗해 생명의 신비와 경건을 느낀답니다. 여름엔 무성한 산나무들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 발목까지 차 오르는 폭설과 적막. 사람 한 명 구경할 수 없는 단절된 신세계가 전개되는 원티 산골마을의 아름다운사계를 보신 적이 있나요? 이런 함양이 우리의 고향이지요. 물레방아골엔 이처럼 아름다운 고향 산골마을이 많지요. 그곳에서 우리는 자라고 컸지요. 꽃피는 산골. 우리의 형제자매. 다볕가족이 모여 살고 있는 함양이 그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 어찌 잊히겠습니까? 안녕 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