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김윤세구제역 殺處分의 근본적인 문제서로 마음만 아플 뿐 별다른 해결책을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적어도 이런 점만이라도 다 같이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을 주체하기 어려워 ‘만물의 영장(靈長)류’라는 일종의 책임의식 때문에 어렵사리 말문을 연다. 두 발굽을 가진 짐승에게만 걸린다는 구제역(口蹄疫)이. 들판을 태우며 번져나가는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정부 당국을 위시하여 관계자들이 만사 제쳐놓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이요. 당사자들은 그야말로 명운(命運)이 걸린 사투(死鬪)를 연상시킬 정도로 혹한의 추위 속에 애를 쓰고 있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현재의 결과를 놓고 볼 때 구제역은 퍼질 만큼 퍼진 뒤 스스로 가라앉기 전에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쓰는 오늘(1월 7일) 벌써 돼지와 소를 합하여 100만 두(頭)의 무고(無辜)한 짐승들. 다시 말해 죄 없는 짐승들이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고 이러한 살육(殺戮)행위는 언제까지 얼마나 더 지속될 지 예측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에서 국가적 축산업의 위기를 막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마당에 “콩이야. 팥이야. 옳네. 그르네” 한다는 것은 사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내키지도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차제에 꼭 한 가지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봤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 부득이 고언(苦言)을 토로(吐露)한다.첫째는 육식(肉食)의 문제이다. 한국인의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최근 급증하는 질환이 육식증가에 따른 대장암이라는 보도를 감안해볼 때 나라의 축산업 육성발전을 위한 노력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국민의 생명의 건강 보호를 위해서는 육류 소비를 지속적으로 늘여나가는 축산정책의 방향을 양적(量的) 성장에서 질적(質的) 성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스러울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이론에서 매출액 위주의 양적성장에서 어느 단계에 진입하면 자연스럽게 순이익 위주의 질적 성장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둘째로는 축산업의 대규모화에 따른 짐승들의 집단 사육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인기영합주의 또는 선거에서의 표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어정쩡한 미봉책(彌縫策)으로 일관하는 무소신 무원칙의 입법 행정 사법의 분위기를 누군가는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반드시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쓴 소리를 덧붙인다. ‘내가 (욕먹을라고) 그 일을 왜 해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제발 나랏일을 함에 있어서 나라 전체.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사안이라면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소신껏 직무처리를 하는 것이 공직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使命)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셋째로는 요즘 나라분위기가 인권(人權)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존중하는 분위기인데 이런 분위기를 살려서 비록 짐승이라고는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학대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의 도살을 엄격하게 금지하여 자연의 이치에 맞는 사육과 도살이 이뤄질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지(周知)시켰으면 한다. 한국에서 사육되는 소들이 모두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 주인공의 하나로 등장한 소처럼 40여년 넘도록 제 수명을 다 누리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가능하면 제 철에 나는 자연식을 먹여 사육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고 항생제 등의 약품이 첨가된 미국 등지에서 수입하는 사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육하다가 경제적 이유로 수틀리면 ‘살처분’이라는 무시무시한 수단으로 기르던 가축들을 무참하게 살육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비정한 행위가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신성한 땅-청구(靑丘)’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인류가 암. 난치병 없는 세상을 진정으로 원할 경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인의 한분으로 추앙받고 있는 노자(老子)의 가르침 도덕경(道德經)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하루속히 인위(人爲) 인공(人工) 조작(操作)을 지양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순리적 삶으로 귀의(歸依)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축산업은 ‘식량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 9kg의 곡식을 포함한 사료가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미각(味覺)을 즐기기 위해 살아있는 짐승들을 죽인다’는 엄연한 진실을 더 이상 숨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희생된. 그리고 앞으로도 희생될 수많은 짐승들의 불의(不意)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명복(冥福)을 빈다.<전주대학교 대체의학대학 객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