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정교회 조한우 목사지난 해 여름 아주 무더웠던 어느 날. 우리 집에 가보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김치냉장고가 뇌사판정을 받고 폐기처분되었다. 8년 전 내가 지리산으로 목회지를 옮겨왔을 때. 우리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던 김치 냉장고였다. 아마도 도시 교회에서 지원을 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덕분에 해마다 편안하게 김치를 보관해서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김치냉장고의 온도가 조절이 안 되더니. 급기야 김치냉장고가 고장이 나 버린 것이었다. A/S 기사를 불러 보았지만 이미 단종이 된 상품이라서 부품도 없고.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는 얘기만 되풀이하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있으면 있는 대로. 또 없으면 없는 대로 잘 버티고 살아온 우리 집이었기 때문에 그 뒤론 김치냉장고에 의지하지 않고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그런데 김장철이 돌아와서 김치가 넘쳐나게 되니까 드디어 김치냉장고의 필요성이 새롭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아내도 이따금씩 김치 냉장고가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장만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골교회 재정으로는 김치 냉장고를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나는 한번 작정을 하면 언젠가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 장점(?)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아내는 나를 ‘시한폭탄’이라고 부른다. 결국 나는 일을 저지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 성탄절이 낼 모레이니 새로운 김치 냉장고가 아내에게 깜짝 놀랄 성탄절 선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진주 시내는 이미 성탄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기회다 싶은 장사꾼들은 손님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진주 시내에 내가 잘 다니는 대형마트 지하에 차를 주차해 놓고서 2층 전자제품 매장으로 올라갔다. 쇼핑을 할 때 여자들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상품들을 고르다가 결국은 그냥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는데. 남자들은 마음에 찍어둔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이쪽도 저쪽도 안 보고 곧바로 그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명색이 남자인데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전자제품 매장으로 갔다. 매장 직원의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는 나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해 주었고. 420리터 대용량 김치냉장고가 단돈 85만원이라는 말에 나는 거의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게 싸든지 비싸든지 그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타사와의 경쟁을 위해서 3만원씩이나 빼주겠다는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질러버리고 말았다. 나의 카드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하나님과도 같은 존재였다.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상품이 배달될 때까지 비밀을 지켜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입이 근질거려서 그만 아내에게 모든 걸 다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던가? 좋아할 줄 알았던 아내는 소리를 빽 지르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거리더니 당장에 가서 취소를 하고 오라는 거였다. 85만원이 누구네 집 애 이름이냐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심한 패배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왜 나는 만날 하는 일이 이 모양인지? 그 날 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김치냉장고를 사기 위해서 결심을 하는 것 보다 이미 신청한 김치 냉장고를 취소하는 것이 더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핑계를 대고 취소를 해달라고 한단 말인가?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김치 냉장고가 필요 없더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내가 벌써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더라고 할까?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날이 밝자마자 아내의 잔소리에 떠밀려서 큰마음을 먹고 진주로 나갔다. 매장에 들어서면서 몇 번씩이나 헛기침을 해봤지만. 저만치 보이는 고객 만족센터 여직원의 모습이 마치 회초리를 든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무섭게 보였다.그러나 내가 누구이던가? 나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빛나는 재치로 위기를 모면해 오지 않았던가? 고객 만족센터 직원에게 영수증을 내밀면서 궁색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우리 집사람하고 갈라서게 되었노라고 그러니 제발 이걸 취소해 달라고 사정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 직원은 취소해 달라는 내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취소를 해 주는 것이었다. 김치냉장고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던지 그 놈을 취소하고 나오는데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날 오후에 나는 텃밭에 항아리를 묻으면서 또 한 번 행복했다. 없는 돈에 ‘이거 사내라! 저거 사내라!’ 하는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보다는 사내 자존심만 조금 죽이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내가 훨씬 더 행복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리산에는 그렇게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2010.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