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순 논설위원지금은 퇴직을 하셨지만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놀라움을 주는 분이 계신다. 많은 부하직원들을 거느리고 언제나 말쑥한 차림의 행정관으로 계셨던 분이기에 지금의 털털한 모습은 좀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권위는 찾아볼 수 없고 수더분하고 털털한 차림은 친근감을 불러 일으켜 더 다정하게 보인다. 최근에 민원실에서 우연히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커피를 나누며 하시는 말씀이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변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소위 잘 나가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난 뒤 몸에 베인 권위의식을 벗어버리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고백처럼 얘기했다.지난 7월 28일 전국 8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8명을 뽑는 보궐선거가 있었다. 선거기간 동안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서울 은평구 을 지역에 출마한 이재오 의원이었는데 90도로 꺾어 인사하는 모습 때문에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곤 했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부담스러울 만큼 고개를 숙이는 인사 때문에 인사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를 고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는데. 계속되는 90도 인사에 시간이 갈수록 여론도 처음의 비아냥거리는 보도에서 진솔하다는 평으로 고개를 돌리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덕일까? 어쨌든 득표수 48311 중에서 득표율 58.33%로 당선이 되었다.인사를 잘 해서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불리한 민심에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유권자에게 다가가고 뻣뻣한 어깨를 과감히 굽힌 전략도 작용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특임장관이 된 지금은 예전처럼 인사를 하지 않지만 뉴스화면에 나올 때면 그 때가 더 가까운 모습으로 기억되어진다.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이나 조직생활을 하면서 한 번쯤 완장을 차고 군림하듯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완장에 대한 향수와 완장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한 쓰라린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을 수가 있다.완장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소외받던 사람도 완장을 차면 어느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고 여기저기를 쉽게 드나들게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어지면서 당연한 대접을 요구한다. 완장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가려주는 면죄부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완장하면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윤흥길의 ‘완장’ 이다. 1983년에 발표된 장편소설인데 시대적 상황이 그 때와 다른 지금에서도 소설 속 인물들을 우리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주인공 임종술은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세월을 보내며 마을에서 한 구석으로 밀려 난 인물이었다. 그러다 저수지의 감시원에 임명이 되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권력을 알게 된 것이다. 삼십여 인생을 완장 찬 이들에게 쫓기기만 했던 임종술에게 완장은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어느 사이 자기 밑으로 스스로 구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종술은 완장을 차게 됨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군림하는 잘못된 권위를 완장으로 인해 마지막 남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많은 사람들이 평상시의 삶에서 조금 나아지는 단계에 이르면 변한다고 한다. 그건 물질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세계와 만나는 철학적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변했다고 고개를 돌려버릴 땐 대부분 권력과 물질이 관련된다.초심을 잃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의욕은 끓고 있지만 적용방법을 잘못 잡아 조직의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끓기도 전에 넘친다’ 는 표현이 딱 맞는 것이다. 숨 가쁘게 달려오다 한 장 남은 마지막 달력이 쓸쓸하다. 그나마 남은 날짜도 얼마 되지도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를 위한 봉사인데 ‘나는 그렇지가 않아’ 라고 얘기하면서 자신의 어깨에 걸친 완장을 내려놓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볼 시간이 되었다. 월드컵에 출전한 박지성 선수가 찬 노란 완장은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한국선수들 가운데 노란 완장을 찬 주장으로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보다 동료선수들이 잘할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완장을 차고서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친 동료들을 격려하고 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전체를 이끌어 가는 빛나는 완장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떤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완장. 사람들에게 마음의 빗장을 채우게 하는 완장은 벗어버리자. 완장을 벗는 순간 긴장은 사라지고 삶의 여유가 생기고 너그러워진다. 멋진 완장을 달기 위해선 군림의 완장을 벗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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