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인섭 부사장이 만난 사람-회장님 호는 뭡니까. “저 남덕유산처럼 덕스럽게 살자고 해서 덕산이요”-회장님께서 고향을 위해 많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서상면 식송마을(이장 홍현용) 주민들이 지난 4월23일 태안군 일원으로 효도관광을 다녀왔다)-남은 여생 고향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실 겁니까? 이제. 서상초 학생 골프 가르치고 싶다 어제 내 고향 서상면(西上面)에 엄청난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 서상을 에워싸고 있는 남덕유산을 바라보니 멋진 운무(雲霧)가 깔려 있다. 어제 내린 비 덕택에 서상 논벼들이 쑥쑥 자란다. 논에 대한 내 상념은 끝이 없다. 논에서 생산된 쌀 그것으로 우리네 삶을 지탱되고…. 어디 나뿐이랴. 서상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의 생명원천 아닌가? 몇 해 전 나는 서상 모씨를 찾아가 “모 선생. 나 서상 상남리 살던 최성권이요. 내 나이 스물도 되기 전 대처로 나가 온갖 고생을 하다 부를 조금 이뤘소이다. 이제 나이도 일흔이 훌쩍 넘어 새삼 고향이 그립고 나를 잉태시켜주신 선친이 보고 싶구려. 이승을 떠난 선친 향기를 조금이라도 맡고 싶어 그 옛날 선친이 일궜던 논을 사들이고 싶소이다. 나 말이오. 세마지기 옛날 부친 논을 네 마지기 가격으로 쳐드리리라. 부디 저 논 나한테 파시구료”모씨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따 최 회장님도 내가 네 마지기 값 받았다가 원진살 끼어 우찌 살겠소. 그냥 세 마지기 값 주소. 나 흔쾌히 저 논 팔리라”이렇게 모씨 논. 상남리 용칠이 성 논을 사드렸다. 지금 내가 사들인 논들은 서상에 사는 내 일가붙이들이 일구고 있다. 일가들은 추수 후 서울 내 집에 3가마니 정도 보내준다. 아내가 지어준 서상 논 쌀밥을 한술 뜨며 나는 내 고향 서상면 그리고 타계하신 부모님 흔적을 추억한다. 나는 일제강점 시대 1938년 서상면 상남리에서 태어났다. 부 최점동 모 한일예. 서상면은 함양군의 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본래 안의군 지역으로 안의읍내 서쪽 위에 위치하므로 서상이라 칭하였으며. 안음3동 중 가장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남덕유산(1.507m) 자락 아래 동으로 월봉산(1.279m). 거망산(1.184m). 서쪽으로 할미봉 육십령 깃대봉. 백운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생각건대 선친께서는 남들보다 호주머니가 넉넉한 고로 풍류를 무척 즐기셨던 것 같다. 선친은 일제 당시 목탄제조업을 해 부를 이루셨는데 허허 그놈의 풍류 때문에 당신이 소유했던 논을 하나둘 파시지 않았나 싶다. “허허 이 사람 당신 부친 그런 사람 아니여!”몇 해 전 고향 내려갔을 때 최모 할머니가 손사래를 하며 부친 관련 비하인드스토리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할머니 일제치하 대전서 여고를 나온 인텔리였는데. 할머니 말씀하길 “한국동란 때 서상에 빨갱이 칠갑(천지)이었다마. 하루는 면사무소 앞에 죽창 든 빨갱이들이 자네 아버지 존함 뒤에 쌍욕을 붙여가며 죽여죽여 고함을 쳐대는거라. 악덕 자본주의자라며. 그때 북에서 온 인민군 간부가 손가락을 아래로 쫙 내리면 자네 부친 목숨은 그 순간 끝장잉거라. 내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인민군 간부 옷소매를 붙잡고 울며불며 간청 안 했나 "간부동무 저 양반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이 동네 인민들을 위해 이런저런 봉사를 한 인민의 참된 벗임니더. 제가 보증을 서겠습니다요"최 할머니가 내게 전해준 증언에 따르면 선친께서는 제주도 김만덕처럼 목탄 사업해 번 돈으로 고향 불우이웃을 도운 이라고 한다. 그렇다. 부친 살아생전 항상 나에게 말했다. “입에 풀칠할 정도가 되면 곶간에 양석(양식)에 조금이라도 남은 게 있다면 이웃을 도와라. 그기 사람 사는 정이오. 대도잉거라”나는 어릴 적 유달리 스포츠에 조예가 있었다. 7순 넘은 안의 서하 서상 사람들은 인간 최성권의 10대를 기억하리라. 내 팔뚝은 강철처럼 튼실했다. 속된 말로 오함마였다. 안의중학교를 다닐 때 내 짝 광태(이 양반은 현대 정치경제사를 좌지우지했던 역술인이었다. 이 분에 관해선 나중 자세히 기술하겠다)가 “성권아 축구같은 것은 바보 멍충이들이나 하는 거다. 내가 보기론 니가 말이다 장차 한국을 움직일 정치거목처럼 보인다. 정치거목이 될라면 서울 대학교 물을 먹어야 헌다. 해서 내가 앞으로 니 대학 잘 가라고 가정교사 해 주쿠마”광태는 짬난 나면 나를 불러 인수분해 삼각함수가 어떠니 일갈했지만 글쎄 내 귀엔 그 말이 도통 무슨 말인줄 모르겠더라. 지금 와 생각하니 안의중학교 재학 당시 광태는 나의 멘토였다. ▲ 최성권 회장. 재경 서상면 향우회장 한국 시니어볼링협회장 역임광태는 “내가 남의 얼굴 관상을 좀 볼 줄 안다. 니는 원래 큰 정치가 될 상인데 내 말 (수학공부)을 안 들어 마 파이다(틀렸다) 정치가 다음 수로 큰 사업가가 될 팔자인데 니 성정이 대범해 후제(나중) 사업가로 이름 날릴 수 있을끼다. 무릇 큰 사업가가 되려면 내가 지금 주는 고사성어 마음속에 집어넣어라 알긋제”그 고사성어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였다. 풀이하면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뜻으로. 남에게 덕을 베풀며 사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에서 인정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 <논어>의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말이다. 삼성 이병철 자문역술인 제산 박재현과 나와의 인연이쯤에서 내 고향 벗 광태에 대해 짧게 기술코자 한다. 광태는 박정희 대통령 장덕진 전농수산부장관 삼성 이병철 포철 박태준 한보 정태수 역술 자문역을 한 풍운아였다. 조선일보 조용헌 칼럼니스트는 광태를 가리켜 한국 최고의 명리학 태두라고 칭송한다. 나중 개명. 박재현이라고 했으며 호는 제산이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제산이야말로 우리 고향 서상을 빛낸 걸물이라고 부르고 싶다. 2001년인가? 포철 박태준회장이 헬기를 타고 서상초등학교에 착륙했다. 이유는 서상 옥산에 사는 제산을 만나 대권을 문의하기 위해. 당시 나는 이 펙트를 우연히 알게 되어 서울 모 신문사 기자에게 흘려줬다. 이후 장안의 모든 언론은 제산의 역술능력을 탐문하기 위해 함양을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 적이 있다. 허허허 제산 덕분에 우리 함양은 일약 주역 명리학의 메카로 부상된 것이다. 제산의 영향력 때문일까. 나는 고교를 마치고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게 된다.스무 살 전후해 정치판을 기웃거려봤다. 당시 함양 정치거목 민병권 공화당의원 수하에서 정치의 기본을 배우다 군에 갔다. 제대 후 직장을 잡아야겠길래 민병권 의원을 찾아갔더니 의원은 그 자리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전화를 하는 게 아닌가. 전화 속에서 김 부장의 기차발통 삶아먹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분 분부신데 제가 감히 당장 그 총각 남산으로 보내주십시오”아하. 정치란 이런 것이구나. 하늘에 나는 새도 잡는다는 절대권력 김형욱 부장의 전화목소리를 듣고 나는 잠시 몽상에 젖어들었다. 중정 근무 후 고향에 가서 국회의원 출마 당선!그런데 나를 면접 보던 중정직원 말 한마디 때문에 허허허 내 꿈은 산산이 무너지고 만다. 그는 나에게 “중정 요직에 넣어 줄테니 백색전화 한 대 상납해라"나는 강직한 스포츠맨인지라 일언지하에 그의 청탁을 거절하고 면접실에서 뛰쳐나왔다. 아하 제산의 말이 맞구나! 나는 (수치에 약한 고로) 정치와 코드가 안 맞구나 그려. 해서 그 옛날 제산이 나에게 니는 사업가 될 상이다는 그 말을 믿고 땡전 한 푼 없이 81년 원창건설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특수건설회사로써 주로 원자력 발전소를 많이 세웠다. 이외 인천축구경기장 안산종합운동장 대전한밭 문화회관을 지었다. 네이버 주소창에 원창건설을 탁 치면 기업체명/원창건설(주)/ 대표자명 최원석/ 영문명 WON CHANG CONSTRUCTION CO..LTD 사업자번호/207-81-13***/ 주소 (305-335) 대전광역시 유성구 궁동 479-8. 6층/ 설립일 1981/04/17 표준산업/시설물 축조 관련 전문공사업(4611)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대표 최원석은 내 아들놈이다.아들은 연세대 공학대학원 도시공학과(석사)를 거쳐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에비 밑에서 차곡차곡 경영기법을 배우다가 현재 이 회사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아들놈에게 경영을 맡긴 후 나는 수구초심이라 그럴까 자주 고향에 내려온다. 고향 땅 옛 생가를 고쳐지어 그곳에 머문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왜 그리 몸과 정신이 평온한지. 나는 지금 생가 응접실에 창 밖을 바라본다. 저 멀리 그 옛날 내 아버지께서 농사짓던 논들을 바라본다. 벼들이 싱그럽게 잘도 자란다. (사이)나는 생가 현관을 바라본다. 바로 저 현관 자리에서 나는 태어났다. 창 밖 논들과 현관을 바라보노라니 상념이 끝이 없다. 저 논과 현관은 내 삶의 또 다른 탯줄이다. 앞으로 여생. 나를 있게 해준 고향 서상면을 위해 작은 일을 하고 싶다. 짜다리(별스럽게) 큰일도 아니다. 요즘 나는 고향에 내려오면 상남리 후배 김학봉이 꼬드겨(?) 골프 개인지도교수 역을 하고 있다. “이노마야 니 골프 못 치제. 내가 니를 그 뭐시기냐 함양의 박세리로 키아주쿠마” ▲고향 생가에서 우인섭 부사장과 인터뷰중인 최 회장# 최성권 회장의 육성고백은 이쯤에서 끝났다. 다음으로 최 회장과 <주간함양> 우인섭 부사장의 대담이 이어진다. -최 회장님 요즘 고향에서 소요유를 즐기십니다. 보기 좋습니다. 이번 여름휴가 고향서 며칠 보내셨나요.“(손가락으로 셈하며) 5일됐나? 나. 우인섭 부사장 보면 미안해 죽겠어. 당신 아들 장가 보낼 때 나보고 주례 서달라 했는데 그 부탁 못 들어 줘서. 아들놈 잘 사요?”-회장님 호는 뭡니까.“저 남덕유산처럼 덕스럽게 살자고 해서 덕산이요”-빈말이 아니라 회장님께서 고향을 위해 많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서상면 식송마을(이장 홍현용) 주민들이 지난 4월23일 태안군 일원으로 효도관광을 다녀왔다)-회장님께서 주선한 걸로 알고 있는데? “참말로 콱! 남사스럽게(부끄럽게) 와그라노. 미성을 보탰을 뿐이다마?당시 주감함양은 효도관광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번 기회는 이 마을 출향인 원창건설(서울 소재) 대표 최성권(73) 회장을 비롯한 최성철. 최석영. 박성용씨가 바쁜 농사철에 앞서 고향을 지키며 고생하고 있는 고향의 선후배와 어르신들을 위해 함께 마련한 자리였다.특히 원창건설 대표 최성권 회장은 매년 노인 효도관광을 보내주고 있으며 면민 체육대회. 어버이날 경로위안잔치 등 각종 마을 행사 시 항상 참석하여 물품 및 성금을 기탁하는 등 고향에 대한 애향심으로 고향 환원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최 대표의 고향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마을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으며 또한 출향인들과 기업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회장님께서는 건설업의 태두입니다. 그 노하우를 살려 고향 서상에 리조트 사업 펼칠 의향은?“아닙니다. 나 여생 고향에 내려와 편히 살고 싶소. 소박하나마 아참 주간함양 몇 주전 보도보니 서상초등학교 기사 나왔데? 그 가시 보니 그 꼬맹이들 골프 공부하더군. 나 시간 나면 그 곳에 가 특별조교 하고 싶어. 우리 아들놈 원석이도 골프 도사인데 그놈도 불러내려 꼬맹이 골프 지도하라 할끼다”-이철우 군수와 막역한 사이지요?“막역? 허허 고향 선후배이지. 그 양반 서울 청와대 근무할 때 자주 만나 고향 이야기 사는 이야기 나누곤 했지. 우리 이철우 군수 심성이 곧아 고향 경영 잘 할끼다. 이 군수 사람이 얌생이처럼 생겼지만 승부욕이 대단해. 검정고시로 명문 성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나온 괴력의 소유자 아이가. 이 군수 군정 잘 이끌거라. 그런 양반보고 콩놔라 팥놔라 할 것 없어 가마이(가만히) 지켜보는 게 도와 주는기라”-사모님도 서상출신?“아니지. 그 이름도 거창한 거창 마리출신. 요즘 마누라 등쌀에 죽을 지경이여. 와(왜) 우리 고향은 거들떠 안 보고 당신 고향 서상만 생각하노? 허허허 우짜몬 좋노?”잠깐 우 부사장 온 김에 점심 먹고 가시게 사모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우리 마누라 해물부침 콩죽 잣죽 증말 잘해. 날씨도 꾸물꾸물한데 사모님 해물부침 어떻게 좀 하하하"최 회장 아내자랑은 계속 된다.“저 양반 불심이 대단해. 팔품행 보살잉거라. 능인선원에 다니는데 여보 법명이 뭐요?”사모님께서 영감을 살짝 꼬집으며 “혜천?아이요 마누라 법명도 모르닝교!" 정리|구본갑(본지 칼럼니스트) 인생- 최성권 작 눈 감으니 고향인데 눈을 뜨니 타향이라타향살이 반백년이 꿈결같이 흘렀구나눈 감으면 고향산천 눈을 뜨고 돌아보니산과 들은 변함없이 어서오라 반기는데새털같이 긴긴 세월 그 무엇을 찾으려고시간없다 한탄하며 앞만보고 달려느냐오는 세월 막지 못하고 가는 세월 잡지 못하니그 무엇을 찾으려는 가날픈 인생살이무엇을 잊었는가 무엇을 찾았는가허전한 이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볼까엊그제는 고향 찾아 부모산소 절했는데이제는 고향찾아 내 묻힐 곳 찾고 있네 2010. 2. 27. 새벽 3시 고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