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정교회 조한우 목사아내가 이웃 동네에 있는 생수 공장에 경리로 출근을 시작한 것은 지난 6월 중순부터였다. 결혼생활 20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아내는 한 번도 가정경제의 실권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여섯 살 차이로 캠퍼스 커플로 만났다. 내가 군대를 제대해서 3학년에 복학했을 때 아내는 식품공학과 1학년 신입생으로 대학에 들어왔고. 그 당시에 나는 연극동아리에서 연극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연극부 후배들 중에는 식품공학과 신입생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친구들을 만나러 왔던 그녀는 내 눈에 들었고. 그때부터 줄기찬 연애가 시작되었다. 결국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 달도 채 안 되어서 나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우리 큰아들이 태어났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아마 그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계산이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직장을 얻어서 은행원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집사람에게 살림을 내맡기지 못하는 나쁜(?) 남편이 되고 말았다. 은행원 시절에는 내 통장으로 월급이 바로 들어오는 바람에 집사람이 돈을 만져볼 수가 없었다. 통장에서 매달 자동이체로 이것저것 다 빠져나가고 나면 내 통장은 항상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내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나마 누리던 월급쟁이의 행복마저도 깨져버렸다. 이제는 시골 목회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모든 경제권을 장악한 완벽한 독재자가 되어 있었다.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해야겠다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 것은 나의 두 아들들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였다. 목사의 부인으로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남들 눈에 곱게 비춰지지 않을 거라는 염려 때문에 몇 해를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드디어 큰 결단을 내려서 지금의 직장에 들어가게 된 거였다. 그러나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도 나의 독재는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 부족한 가정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아내의 급여가 통장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내 계좌로 자금을 이체시키는 심각한 범죄(?)를 계속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뻔뻔한 남편이 있을까 싶지만 살림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도 아내는 염치없는 남편을 향해서 단 한 번도 뭐라고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고 서둘러서 밀린 설거지를 마무리 해 놓고. 세탁기를 돌려서 우리 아이들 교복을 하얗게. 하얗게 새하얗게 빨아서 반듯하게 다림질을 마쳐 놓았다. 이렇게 오늘도 우리 가정엔 살얼음판 같은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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