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도의원 문정섭2일과 7일 함양장날이라도 되면 버스타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웠고 한차례 전쟁과도 같았다.특히 인월이나 남원방향 막차라도 되면 먼 곳 마천이나 인월 상죽 승객들은 먼저요. 가까운 구룡이나 난평 승객들은 밀려 있다가 여유 공간이 있어야 승차할 수가 있었다. 순서는 맞다. 가까운 곳에 갈 승객은 먼저 내려야 하므로 반대로 승차하는 것은 안맞다.당시남원 전북여객 경우 버스차량번호가 64번을 비롯하여 65.66.68.69.70.71.74.625.805 등 10대가 운행하고 있었으며 차량의 엔진이 있는 앞부분이 튀어나와 있었고 뒤에는 약간의 짐을 싣는 자리가 있어 돼지 새끼나 유류. 비린내나는 갈치나 고등어 등은 이곳에 싣곤 했다.주차장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차표를 검사하고 차를 태워주는 아저씨들 말버릇 또한 대단했다. 어른 아이가 없다. 귀에 익은 욕설은 예사다. 이 새끼! 저 새끼! 개새끼! 당시는 차장도 남자만 2명이 승차하고 다녔다. 출입문이 2개라 앞과 뒤에 각각 1명이 있었다. 그 후 차량이 대형화되고 서비스의 질이 향상되고 경제적으로 고비용을 줄이기 위해 여자가 승무원으로 교체가 되었다.필자는 학창시절 몇몇 차장들과 친하게 지냈다. 지금도 누님이라며 가끔씩 전화도 하고 모 시장 사모님과도 통화를 하면서 선거에 당선되었을 때 축하전화도 해 주었다. 차장 누나들은 필자를 예쁘다며 차비는 받지 않고 가끔 용돈도 주었으며 일기책도 사주곤 했다. 필자는 친절한 차장 누나들에게 고구마를 구워 주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며 대구. 진주 개천예술제 행사에 따라가 구경도 하였다.당시 광주와 대구를 왕복하는 광주여객은 1일 8회를 운행하였고 2대는 함양에서 숙박을 하고 이튿날 광주와 대구로 각각 출발했다. 대한금속은 부산에서 전주까지 운행했으며 부산에서 새벽 4시 반에 출발하였고 함양에서 13시에 전주로 출발했다.73년도 필자가 읍사무소에 근무할 당시 장거리 운행버스인 대한금속이 사고가 나서 우리 집에서 하루 저녁을 묵은 적도 있었다. 그때 필자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금성제품 14인치 텔레비전을 배터리로 충전 사용하였으며 인기 연속극 장욱재 주연의 여로가 한창 방영되던 시기였다.74년 필자의 구식결혼 당시에는 읍사무소 직원 50여명 중 40여명이 퇴근 후 함양읍 죽림리 필자의 집에 저녁식사를 하러 왔는데 식사가 끝나기 전에 막차가 내려와 일행 중에서 버스를 20분 정도 잡아놓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탄일도 있었다. 당시 필자를 도와준 차장 누나들께 감사를 드리며 늘 행복하게 사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