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이 걱정 된다  논설위원 문복주  ❬상림예찬❭이란 글을 잠시 읽어 보자. -내가 상림을 만나게 된 것은 8년 전이다. 건축 설계와 허가 등 함양에 며칠 머물러야 했던 나는 하루에 한 두 시간 볼 일 보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다행히 바로 옆 몇 걸음 가면 기막힌 숲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상림 숲이었다. 새벽이고. 낮이고. 밤이고 많은 시간을 상림 숲 속에서 어슬렁거렸다. 사운정(思雲亭)? 구름을 생각하는 집? 거 참... 사람들은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달리고 뛰고 걷고 조깅한다. 나는 바쁘게 달리는 것을 경계한다. ‘ 어허-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경거망동 뛰다니-’ 고독한 산보자의 꿈을 음미하여 숲을 거닐다가 그늘진 한적한 곳 벤치에 눕는다.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진다. 잠깐 잠이 들었는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풀들이 서걱대는 소리. 다람쥐 다니는 소리. 사람의 발자국 소리. 자전거 굴러가는 소리. 풀벌레 부스럭거리는 소리. 열매 떨어지는 소리. 연인들의 사랑 나누는 소리. 나는 가만히 누워 귀를 모두 열어 둔다. 숲의 정기가 온몸에 전해 온다. 정신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슬슬 다시 걷는다. 상림에서는 오장육부 다 쓸어내리는 꿀맛보다 더 맛있고 시원한 상림 약수를 빼놓을 수 없다. 상림에 와서 이 약수를 먹지 않으면 상림에 온 것 같지 않다. 약수터 그 옆에는 구멍가게집이 있었다. 상림의 첫 길목인지라 항상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야 했다. 만남의 장소요. 헤어짐의 장소요. 앉아 쉬는 쉼터인지라 자연 옛날 주막 그 자체였다. 아이들이 무더기로 달려 와 아이스크림을 줄줄이 빤다. 여학생들이 빼빼로를 사 먹고. 남학생이 컵라면을 먹고 있다. 할매들은 그 앞 참나무 도토리 열매가 우박처럼 떨어지면 머리에 맞으면서 줍고. 나는 아예 그늘진 평상에 앉아 소리친다. “아지매. 여기 탁주 한 사발. 도토리 묵사발 하나 주소!” 그 곳 도토리묵 맛은 정일품이었다. 아하. 생각이 난다. 상림의 명물. 점쟁이 할아버지. 사운정 앞 길가 고목나무 아래 주역. 사서삼경. 어렵고 이상한 원색 탱화 그림책 서너 권 앉은뱅이 탁자에 올려 놓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리를 지키던 할아버지. “ 아가씨. 이리 와서 관상 한번 봐봐. 동쪽으로 가면 좋은 낭군 만나 시집 갈 상이구만.” 아줌마들도 아가씨들도 여학생들도 키득키득거리며 쪼그려 않아 손도 내밀고 얼굴도 보이면서 사주에 팔자를 점쳐보던 상림 숲. 그 할아버지는 가끔 오일장에도 나오더니 이제 보이지 않는다. 신선이 되어 날아 갔는가? 공원에는 늘 이런 사람들이 한두 분 있어 꼬이고 꼬인 인생을 풀어주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이다. 나는 상림의 꿈길을 걷는다. 낯설음으로. 설레임으로. 잔잔한 기대와 이슬 같은 촉촉함으로. 고독과 성찰로 걸어가는 길의 저 끝엔 상림숲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 말 못할 기쁨을 숨기며 어슬렁 걸어 그에게로 간다. 대자연 상림이 나를 그윽이 깊게 안는다. 천년을 기다린 그가 나를 안을 때마다 나는 황홀히 졸도한다. (필자의 ‘상림예찬’ 중 일부)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상림을 걱정 한다. 상림은 10년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고치고 고치고 고쳐져 성형미인이 되었다. 대로를 지나가면서도 추억어린 위천천은 보이지 않는다. 보도블럭과 가로수는 해 따라 바뀐다. 산책의 주요 입구는 주차장으로 변해 자칫하면 대형 버스에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군민의 종이 들어서고. 어린이 공원이 들어서고 내년이면 문화예술회관. 함양군박물관. 군민도서관. 사회복지관. 도시와 농촌 만남의 광장. 최치원 선생 사당 등이 들어 설 예정이다. 서울 명동거리도 아니고 남대문시장도 아닌데 왜 하필이면 상림 이 한 곳에 이 모든 시설과 단체들이 다 들어서야 하는 것일까. 하림은 안 되는가? 행사 한번만 열어도 장사꾼에 공연단에 구경꾼에 교통지옥에 난리인데 상림은 이제 천년의 숲이 아니다. 들렸다 가는 다른 관광지와 다를 바 없다.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에게 최초의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나온다.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아는 자’ 이고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아는 자’이다. 관계자들은 먼저 아는 자이고 군민은 나중에 아는 자이다. 먼저 아는 자는 10년 100년 1000년 앞의 일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상림의 진정한 발전이고 함양이 잘 살고 행복을 느끼는가를 뼈를 깎는 자세로 고민하고 하나라도 헛됨 없이 살펴보고 고뇌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상림의 정말 고운 자태와 매력과 우아함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이전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중의를 모으고 문제점들을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라고 하지만 스님이 없는 절이 절인가? 그렇다면 상림을 하림 곁에 갖다 놓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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