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은희(안의초6년)아침 일찍 학교에 모여 경주로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어제 날씨가 안 좋아서 많이 피었다던 벚꽃이 다 떨어졌을까. 오늘도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버스에 올랐다. 약 2시간 30분정도 걸리는 어쩌면 지루할지도 모르는 시간동안 우리는 음악을 듣고.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퀴즈를 맞히고. 자고. 이야기하고. 먹으며 놀고 있었다. 교장선생님과 함께 간다는 긴장감은 현장체험학습을 간다는 설렘에 어느새 잊혀져 버렸다.경주에 도착하니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듯 어느새 날씨는 맑아져 있었고. 벚꽃은 구름이 내려와 있는 듯 아름답게 펴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말씀대로 경주는 정말 매력적인 곳인 것 같다.처음으로 도착한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사회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다.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는 이 성덕대왕신종은 무척이나 컸다. 게다가 밑에는 둥그스름하게 파져 있었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니 그 곳에서 소리를 모아 그 소리를 더욱 더 아름답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일본이 질투해서인지 1925년 일제강점기 때에 매일신보에 올라온 ‘어밀네종’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아이를 넣어서 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이다. 그 이야기 때문에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나도 ‘에밀레종’이라는 이야기를 한 번 읽어 봤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중시 여기는 불교에서 아이를 종 만드는 데 넣다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간 곳은 고고관이었는데. 요령식 동검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사회 시간에 배웠던 비파형동검인 줄만 알았었던 요령식 동검은 비파형동검과 많이 비슷해 보였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문화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관에는 철로 만들어서 조금은 녹이 슨 유물들도 있었고. 흙으로 된 토기들도 있었으며 금. 옥. 은. 청동 등으로 만들어 진 것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 금관은 정말로 화려했다. 한 번 써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문화재니 어쩔 수 없다. 모형이라도 한번 써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고고관을 나오니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모형이 아닌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중에 가게 될 불국사에 있는 탑들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다보탑은 10원에서 많이 보기는 했지만 모형이라도 이렇게 보니 느낌이 달랐다. 석가탑은 다보탑에 비해서 무척이나 간단해 보였는데 다보탑은 성 같은 느낌이 나는 반면에 정말로 탑같이 보였다.미술관에는 사회 교과서가 아닌 국어 교과서에서 봤던 얼굴무늬수막새가 있었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표정에 나도 함께 미소를 지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수막새의 미소에는 따라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랫부분의 일부가 부서져 버리지만 않았어도 천만불짜리 미소가 되었을 것이다. 역시 불교문화와 관련이 깊은 신라라서 그런지 불교와 관련된 문화재들이 많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금동비로자나불좌상 이었다. 이 불좌상은 특이하게 손 모양이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달랐다. 불국사에 가서 배운 것이지만 손모양은 부처님이나 보살님마다 하는 말씀을 담고 있다고 한다. 미술관에는 여러 가지 비석들도 많았는데. 모두 한자여서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가끔가다 아는 한자들이 나왔다 해도 다른 한자들을 몰라서 도무지 무슨 뜻인지 헷갈리기만 할 뿐이었다. 또 미술관의 황룡사 실 가운데에 있는 치미를 보았다. 나는 처음에 지붕에 얹어 놓았다고 10cm 정도 되는 크기의 치미를 확대해 놓은 것 인줄로만 알았는데. 182cm의 크기 그대로 라니 정말 놀랐다. 또 미술관에는 반가사유상이라는 불상이 있었는데. 팔과 얼굴이 없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원래는 가려고 했지만 가지 못한 안압지관에는 금동용머리장식. 금동삼존판불 등이 있다고 한다. 그것들을 모두 보지 못해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사실 나는 안압지관이 제일 기대되었었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못을 바라보기도 했다는 이 안압지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하기도 한다.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불국사로 향했다.불국사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인데 설명해 주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까지 지나왔던 일주문이라는 문과 둥그스름한 다리. 천왕문이라는 문이 있던 이유는 부처님의 나라로 가는 높은 산을 간다라는 것을 뜻한다고 하며. 천왕문은 마음이 나쁜 사람은 지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신라 사람들은 무척이나 불교를 믿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모든 곳을 지나 와서 교과서 사진에서 봤던 이곳 까지가 바로 인간세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국보인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연화교와 칠보교 1200년 전의 신라의 석공의 손길이 닿아 있는 문화재 이다. 이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가면 부처님의 나라에 도착한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 나라에 가는 길에는 연꽃이 있으며 7개의 보석이 있는 곳을 지난다고 하여 연화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칠보교는 7가지의 보석을 뜻하는 7개의 계단이 있다고 한다. 연화교와 칠보교 위에 서 보니 정말 아찔하게 높은 느낌이 들었다. 연화교와 칠보교로 올라왔다면 많이 무서웠을 것 같다. 연화교와 칠보교 위에는 안양문이라고 적혀있는데 안양이란 극락을 뜻한다고 한다. 극락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국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 옆에는 반달모양으로 되어 있는 물 받침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도 비가 오면 물이 많이 쏟아져서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났을 때 무지개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 위에 적혀있는 한자는 자하 문인데 이 말은 ‘부처님 나라를 가는 신비로운 곳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도 우리처럼 무척이나 무지개를 좋아했나 보다. 그리고 무지개의 원리를 잘 알았던 것인지 이런 것을 만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120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랭이 공법’이라는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지진이 났을 때 제자리를 찾아가 더욱 단단해져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과학적인 건축이 가능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으로 실제로 본 다보탑과 석가탑은 정말 신기했다. 다보탑은 아까 말했듯이 성같은 느낌이 났다. 이것저것 장식도 많고 보기도 아름다워서 정말 만들기 힘들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다보탑보다는 석가탑이 훨씬 더 만들기 힘들다고 한다. 다보탑에 비하여 석가탑은 장식이 많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어긋나도 보는 사람이 무엇인가 엇갈린 느낌이 나서 정확하게 맞추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앞에는 바람의 방향 등을 측정하는 장치가 있었다. 과학이 많이 발달한 지금도 이렇게 만들기가 힘든데 지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과학기술로 어떻게 그러한 탑을 몇 백 년 동안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는지 신라석공들의 솜씨에 감탄할 뿐이었다. 다보탑의 안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다고 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인쇄술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보탑이나 석가탑 앞의 땅에 파서 그 위에 돌을 얹어놓은 듯한 것이 있었다. 공기가 통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설명해 주시는 분은 가셨고. 선생님께서는 사진을 찍는 중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쭤본 다는 것을 깜빡해 버렸다.우리나라의 건축기술을 알아 볼 수 있는 다른 것은 바로 기둥이었다. 한옥의 기와는 무게가 상당히 많이 나가기 때문에 기둥이 중요한데 윗부분에서 중간부분으로 갈수록 넓어졌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이다. 이런 모양이 무게를 더욱 더 많이 견뎌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의 신전도 이런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관세음보살님께 가는 계단은 무척이나 경사가 졌었는데 그것은 역시 가장 높은 산을 오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님 뒤에 있는 그림을 탱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얼굴이 10개가 있고 손바닥이 1000개가 있으며 그 손마다 모두 눈이 하나씩 있는 십일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있다. 이름을 외우느라 힘들었다. 부처님과 보살님들께서는 왜 이렇게 이름이 긴 것인지 너무 헷갈린다. 1000개나 있는 손에 달린 눈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지 찾아다니면서 도와주시는 아주 좋으신 분이라고 한다.법당에 있는 비로자나부처님은 태어나신지 얼마 안 되신 것처럼 무척이나 번쩍번쩍 빛이 나셨다. 그런데 이것은 100년쯤마다 한번씩 금색 옷을 입혀 드려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100년마다 한번씩이라고는 하지만 무척이나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봤듯이 비로자나부처님의 손모양은 정말 특이했다. 두 번째 손가락을 위로 세우고 다른 손으로 그 손가락 끝을 감싸고 계시는데. ‘너와 나는 하나다. 깨달은 자와 깨달지 않은 자는 하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마다 하시는 말씀에 따라 손모양이 다른데. OK 사인과 같은 모양은 내가 지금 좋은 말 하고 있으니 잘 들어 봐. 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신기했던 것은 사리탑이었다. 사실 신기한 것은 사리탑이 아니라 ‘사리’란 것이었다. 득도를 하신 스님이 돌아가시고 화장을 하게 되면 사리가 나온다는데 한번도 보지 못해서 많이 무척이나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사리는 함부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함부로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리탑에는 지금 현재 사리가 보관되어 있지는 않으나. 사리가 보관되었을 당시 사리탑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리탑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사리탑은 정말로 아름다웠다.그리고 극락전 앞에는 황금돼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돼지에게 소원을 비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리고 또 한 마리의 돼지는 극락전 현판 뒤에 돼지 조각상이 있었다. 아이들은 잘만 찾는데 나는 왜인지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안 써서 그런 것 인지 내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런 것 인지 좀 많이 씁쓸하기는 했다. 불국사를 한바퀴 쭉 돌고 나니 정말 다리가 아팠다. 이정도로도 아픈데 신라시대에는 더 컸다니. 스님들은 모두 다리가 무쇠로 되어 있으신가 보다. 하지만 다리가 아픈 만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으로 가게 된 석굴암은 구경하는 시간보다 사진 찍는 시간과 이동하는 시간이 더욱 많이 걸린 것 같았다. 석굴암에 가기 전의 입구에는 종을 치고 있었는데 왜 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석굴암 앞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석굴암에 관한 동영상을 볼 때에는 부처님이 커 보이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너무 커서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면 목이 아플 것만 같았다. 이때까지 본 부처님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마에 보석을 도굴꾼들이 훔쳐가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는 석굴암에 유리벽이 없었다고 하는데 계속되는 문화재 훼손으로 유리벽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조금만 주의한다면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아낌없이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물론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우리가 안에 들어가서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함께 말이다. 석굴암에서 옆길을 따라 내려왔을 때 여러 곳에서 많이 보았던 기왓장에 소원을 적는 것이 있었다. 예전부터 한번쯤은 해 보고 싶었지만 이것을 하다가는 선생님께도 혼날 것 같고 아이들을 놓치고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해 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이것도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꿩 대신 닭이라고 구경만 하게 되었다. 외국 사람이 적은 것인지 영어로 적혀있는 글도 있었고. 이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글들이 제일 많았던 것 같았다. 왠지 이 기왓장에 소원을 적으려 하면 적을 것이 생각이 안 날것만 같았다. 다음에 가족이랑 오게 된다면 한번 해 봐야겠다.다리는 피곤했지만 눈은 말똥말똥한 탓에 우리는 집에 간다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장난을 치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왕릉들과 세계최초의 천문대인 첨성대를 보았다. 왕릉은 보통의 무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고 넓었다. 역시 위대하신 분들이라서 그런지 넓게 계시나 보다. 집에 돌아와서 사진들을 보니 왕릉의 안을 공개하여 놓은 곳들을 보았다. 하지만 왕릉은 왕의 무덤이다. 무덤이란 영혼이 사라진 몸체가 영원히 쉬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왕의 무덤이기에 더욱 더 엄숙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을 위하여 공개를 하여 놓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학습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왕릉을 함부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라던가 아니면 아주 중요한 일을 할때 들어가기 위해 통로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물론 배운다는 의미에서 해 놓는 것은 좋은 의도이지만 한때는 왕이었던 사람이 편히 쉬게 놔둬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왕릉의 모형을 만들어 놓은 것도 좋을 것 같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게임을 해서 여기저기서 ‘사랑해’라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고 남자아이들은 민망한지 아예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경주의 날씨가 너무 화창한 탓인지 더워하는 아이들은 맨 뒤에 가서 앉아 창문을 열고 있었으며 평평한 길을 가고 있을 때에 일어나 친구와 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추억이 되는 일 이었다. 무엇보다 항상 교실에서 수업하고 배웠던 신라의 문화들을 이렇게 직접 보니 더욱 더 기억에 오래 남는 일이었다. 백물이 불여일견이라고 역시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다음에는 신라 말고도 고구려. 백제 등의 나라와 철기문화가 많이 발달했다고 했던 가야의 문화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번에는 인터뷰 내용을 외우다 보니 경주국립박물관. 불국사. 석굴암 등에 대해서 잘 모르고 왔었다. 그러니 2%부족한 현장학습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는 사전조사를 확실히 하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