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걷는 지리산 둘레길 문복주(논설위원)남도로부터 매화꽃 소식이 왔다. 그러므로 봄은 올 것이다. 봄은 온다. 만물의 일부인 인간은 멈추었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할 것이다. 지난 2월 27일 본지 주간함양과 (주)인산가에서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업으로 시행한 함양명산산행 지리산 둘레길 탐방이 있었다. 100명이 넘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동을 출발하여 금계를 거쳐 롯지에서 해산했다.이 아름다운 길 걷기 탐방은 제주 출신 서명숙씨에 의해 시작된다. 제주의 촐길 따라. 오름. 바다 따라 올레의 첫 걸음을 걷자 기적의 걸음이 되어 전국의 구도자와 순례자가 전부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그녀가 걸었던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모세의 길처럼 전국 각지에서 생겨났다. 함양도 지리산 둘레길을 설정했고 지리산 실존에 대한 인식과 인간 원형 회복의 첫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길은 아마 인간이 몸으로 쓴 가장 오랜 최초의 역사일 것이다. 왜냐면 최초의 인간이 직립보행으로 걸으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걷기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인간은 두발로 걷게 되면서 손과 얼굴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움직이라고 생긴 것이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며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현대는 얼마나의 시간을 우리에게 걷기를 허용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걷기를 멈췄다. 두 발을 버리고 하나의 머리로 살려고 한 것이 비극의 시작임을 몰랐다. 앉아서 돈을 세기 시작했고. 다리를 자르고 차와 비행기에 올려놓음으로서. 책상 위 컴퓨터에 눈과 머리를 바침으로서 몸과 정신은 양철북의 아이처럼 정지 되었다. 지리산 둘레길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모양따기로 그냥 코스만 설정해 놓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오라. 걸으라’ 할까를 경계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찾고 걷는 명소가 되기 위해서는 둘레길 차별화를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둘레길은 자연 속에서 자연인으로 자유롭게 걷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 둘레길은 먼저 역사가 걷는 둘레길이어야 한다. 즉 차별화이다. 그냥 자연과 함께 걷는 길은 많이 있다. 지리산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한국의 산 역사다. 그러므로 역사가 걷는 탐방의 길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 옛날 전라도. 경상도 장꾼들이 봇짐과 지게를 지고 넘어가던 고갯길. 청매선사가 화두를 들고 고뇌하며 스승을 찾아가다 도를 깨달고 돌아간 오도길. 선비들이 찾던 두류기행의 길. 거창. 산청. 함양의 양민을 학살하던 9연대의 피의 길. 정순덕이 숨어 지내던 빨치산 루트 길. 백두대간의 시작인 태백의 길. 영남영서학파가 숨쉬는 정자를 찾아 가는 선비문학의 길. 아름다운 고가로 가는 길. 무엇을 더 말하랴. 역사가 없는 길은 길이 아니다. 쉼터와 샘터와 초가와 문전옥답과 촌마을과 촌로와 삶을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 놓아 둔 길을 걸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나뭇짐이나 소금가마를 지어 보게도 하고 그 옛날 상인들이 머물던 산속 주막도 차려 시원한 막걸리와 지짐을 먹고 오두막에서 한잠 자고 걷게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곳곳엔 역사의 글들이 놓여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하이델베르그에〈철학자의 길〉이 있듯〈칸트의 길〉도 있고.『고독한 산보자의 꿈』을 쓴〈장자크 루소의 길〉도 있다. 라즈니쉬의〈길없는 길〉. 푸르스트의〈가지 않는 길〉.〈오디세우스의 길〉.〈신의 길〉. 파울로 코엘료의 〈이타카로 가는 길〉이 있다. 그 모든 길은 역사와 세상으로 통한다길은 걸어가라고 있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정신의 세계를 자연에 풀어 놓는 일이다. 길에는 노래가 있고. 시간과 정신의 묵언과 역사가 숨어 있다. 이런 냄새를 맡으면서 역사의 지리산 둘레길을 걷게 함으로서 어머니 같은 모성의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지리산의 가치와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지리산 둘레에 사는 둘레길 사람들이 만들어야 할 길이다.역사 속으로 깊게 걸어 들어가는 당신의 길 하나 쯤 열어놓으면 세상은 훨씬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