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들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희생됐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지리적 여건으로 빨치산이 활동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공비토벌작전 중 빨치산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함양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함양군 읍면 민간인 80여명을 포함해 보도연맹, 연고지가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무고한 희생자가 3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함양민간인 희생사건 86명, 강정금 상해사건 1명, 부산형무소 사건 16명, 국민보도연맹사건 29명, 적대세력사건 29명, 전주형무소사건 2명,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명, 서부경남민간인 희생사건 15명, 전북지역민간인 희생사건 1명 총 181명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70여년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 온 유족들의 설움은 아직도 깊기만 하다.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그날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날까지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붙잡아 둘 의무를 갖게 됐다.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이르다하기엔 너무 늦었고 늦었다고 하기 보단 다행이었다.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야 했던 힘든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언해 준 유족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함을 전한다.   서하면 다곡리 대황사건<1950년 9월26일>   1950년 9월26일 오후6시경 서하면 다곡리 산68번지(대황령 고개)에서 수많은 총성이 대황마을에 들려왔다. 그 익일이 추석날이었다. 이는 6.25전쟁 후 1950년 9월23일 북한 인민군이 진주에서 후퇴해 오던 중 지곡면을 경유 서하로 넘어오는 대황령재에 도착하여 사태가 불리하여 무차별 총살을 시켰다. 그 당시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학살된 인원이 375명 정도가 되며 그 중 생존자는 약 10명에 불과하며 중상자는 매황마을에서 간호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인원도 수명이 된다.   희생자 자녀, 제대로 풀린 사람 없어 바느질 방향보고 시신을 찾아 두들겨 패고 돈이나 좀 주면 풀려나고   문종근씨는 유복자다. “아버지는 일본에 갔다 왔어요. 인물도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동네 들어오면 훤했다고 해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가 살던 집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4킬로 정도 더 올라가야 해요. 그때는 경찰들 앞잡이가 있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두들겨 패고 돈이나 좀 주고 하면 풀어주곤 했다고 해요. 그날은 우리 아버지랑 다른 한 분이 또 아무 죄도 없이 끌려 갔어요. 서하 지서로 잡혀갔는데 아버지는 맞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 하셨고 한 사람은 쥑살나게 두들겨 맞기만 하고 살아 나오셨대요. 서하에서 죽은 사람을 함양경찰서로 데려갔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함양경찰서에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갔지요. 죽여 놨으니 어쩌지도 못하고 싣고 간 거지. 가면 갔다 오겠지 하고 갔는데 죽었지” 같이 끌려간 마을 사람이 살아나와 아버지의 허무한 죽음을 얘기해 주었다. 문종근씨의 집안은 학자 집안으로 증조부는 통정대부를 지냈다고 한다. 그 시절엔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으니 더욱 괴롭힘을 당했다고. “소도 몰고 갔어요. 암소가 좋은 게 있었는데 빨갱이 놈들이 짐을 싣고 다녀야 되니까 우리 집 암소를 가져가고 황소를 주고 갔어요. 근데 또 지서에서는 그 황소를 빨갱이가 준거라고 가져가서 어쨌는지도 몰라요. 그 소가 우리 살림살이였다는데” 다 뺏기고 아무것도 없이 21살 때부터 종가살림을 맡았다. “아버지 아들 형제는 세 명이었는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잃었지요. 다른 한 분은 군대가서 텐트에서 주무시다가 이북 놈들한테 화염방사기로 두들겨 맞아 육군 병원으로 후송돼서 죽다 살아왔는데 제대하고 얼마 후 돌아가셨어요” 문종근씨의 아버지가 큰집 양자로 갔던 터라 제사도 많았고 큰 형님 대신 조카들까지 키웠다. 어린 나이 때부터 집안의 짐을 지고 버텨 온 문종근씨는 “이리 기구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며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나는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또 우리 작은 아버지가 그때 살아계셔서 들었지요. 아이고... 사는 게 사는 것도 아니고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고. 우리 친척들 같은 경우는 군대를 가서 민정 경찰을 들어가려고 해도 신원 조회가 있어서 하지도 못했어요. 이제 명예 회복을 하고 나서 조금씩 이런 게 풀리기 시작한 거지 그전에는 공무원 시험을 칠 수가 있나 뭐 아무것도 못하고 딱 묶여서 살았어요. 희생자 자식들은 제대로 풀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문종근씨의 작은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다. 다곡리 대항재로 사람들을 끌고 가 그들에게 구덩이를 파게하고 둘러 세워놓은 다음 총살 시켰다. 며칠 만에 작은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바느질을 했던 작은 어머니의 바느질 방향을 보고 입고 있던 옷을 구분하여 시신을 찾았다고 했다. “하준수가 여기 와서 살았었대요. 그래서 이 동네가 피해를 무지하게 본 거에요” 희생자는 많지만 명예 회복된 사람은 여섯뿐이라고 했다. “내가 명예 회복 처음 시작할 때 만든 서류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다 객지로 나가고 세상 버리고 해서 연락이 안돼요. 아들 대에서 끝나고 손자들은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명예 회복은 됐지만 보상이고 이런 거 일절 없어요. 너무 억울해도 모르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당하고만 살은 거예요. 아이고 참”.이 기사는 증언자의 구술을 그대로 살리고자 방언을 사용하였습니다. 구술 내용 중 날짜, 나이, 숫자 등에는 구술자의 기억의 외곡이 있을 수 있으며 전체 내용 또한 증언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됐습니다. 문종근 유족 ■ 이름 : 문종근■ 희생자와의 관계 : 희생자의 아들■ 생년월일 : 1949년 6월 6일 / 만 74세■ 성별 : 남■ 주소 : 함양군 서하면 중산길31■ 직업 / 경력 : 농업   함양양민희생자희생자 정보■ 이름 : 문정규■ 생년월일 : 모름■ 사망일시 : 1948년 음력11월29일, 당시 38세■ 성별 : 남■ 결혼여부 : 기혼■ 주소 : 경남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958■ 직업 / 경력 : 농업■ 기타 : 작은아버지 문용규씨도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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