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기자로 뽑힌 뒤 처음 주간함양에 갔을 때 담당자 분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혹시 글에 관련된 직업 가지고 싶은 사람 있니?” 그리고 나는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 더 엄밀히 말하면 꿈 중의 하나이다. 이 꿈을 생각하며 소설가에 대해 알아보며 몇 가지를 새로이 알게 되기도 했다. 그 중 두 가지는 첫째로 문학자가 되기 위해선 주요 신문사나 문예지에서 일정한 상을 수상해야 한다는 것(물론 문인협회에 정식 등록하기 위해서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 문단계는 그런 것에 가치를 두는 경향성이 있다.), 둘째로는 한국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녹록치 못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소설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중 “막노동 안 하고 소설가로 가족을 가져 잘 살면 그 사람이 귀인”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이것은 한국에서 유명한 소설가 이외수의 말이다. 그 유명한 소설가마저 이런 말을 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소설가가 쉽게 살 수 있다고 할까.이것에는 독서량 부족, 대한민국 개국 이후 반공이라는 ‘사상’에 의한 문학적 작품들의 다수 탄압(대표적인 예로 이태준의 작품들을 들 수 있겠다. 월북 작가로 일제 강점기 당시 상허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등이 있겠으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바로 ‘사상의 부재’이다.
모 작가는 유명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학적인 사상이고 뭐고 그런 이야기 하는 놈들은 다 때려 죽여야 해요.” 하지만 내 견해는 그와 정반대다. 한국에서 소설가가 힘든 이유는 소설가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러니까 사상적인 부분에서 볼 때,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사후(死後) 약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일본에서 사랑받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전후(戰後) 사상적인 허무함을 겪는 일본 세대에 <사양>과 <인간 실격>이라는 “선물”을 선사했다. 심지어 “사양족”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그의 문학이 그려내는 일본과 그 일본에 선사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상”은 신선한 것이었다. 그렇게 일본의 전후 공허함에 따른 사상의 부재를 그려내고, 일본의 사상적 변화를 꿈꾸었던 그는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의 하나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이른바 “명소설”을 봐도, 주로 역사소설, 사회 고발 소설, “애국” 소설 같은 것밖에 없다. 조정래, 김진명 등의 현대 한국 유명 작가는 웬만하면 모두 이 부류다. 그 주제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 한국 소설은 그래서 아무리 읽어도 답답함이 해소되지를 않는다. 특히 이른바 “헬조선”이 신드롬으로, 한 개의 시대적인 “현상”으로 변화하는 현재에, 이 공허함은 특히나 더 큰 것이다.
한국 문학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공허함은 그 중심으로 떠올라 문학적 경향으로 심화되지 않았다. 어두운 감성, 상실, 그런 것을 한국의 독자들은 원하고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상황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줄 도피처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 고발 소설이 이 역할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겠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 고발은 극히 일부만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더 옳다. 즉, 대체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한번쯤 문학적 혁신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한강이라는 작가가 최근에 맨부커상을 타기 전에는 분기를 한 달로 보더라도 한국 작가가 거대서점 등에서 출판한 책의 그 분기 판매량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 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일본 작가, 서양 작가가 다 차지하고 남은 적당한 자리를 한국문학은 겨우 차지할까 말까다. 독창적이지도, 자신을 어루만져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신춘문예에 관한 글들을 찾아볼 때도 이 “독자를 어루만지지 않는” 문제점은 그대로 답습되어 토로되었다. 독자를 어루만지기보다 그저 예술에만 빠져, 진정 독자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할 문학이 자기의 입으로 소리만 지른 채 끝나는 것이다. 또 예술을 했다면 아름답기라도 해야겠지만 마치 향수를 뿌려대 냄새가 지독한 여성 같다. 문학적 기술을 과도하게 남발해 매번 흩어진 채 끝맺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기술만을 익힌 작가들이 겨우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과연 그들이 문단계를 바꿀 수 있을까? 또한 선배 작가들도 문제다. 특히 한국 유명 작가들 중 신경숙이 표절을 했다는 것은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나침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뻔뻔함과 나태함. 그 둘로 한국 독자들에게 위선해댄 채 또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버린다. 독자는 다시금 배제된다.
한국 문단은, 독자와 소통하고, 독자를 어루만지는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투정부리며 순수문학으로, “이제까지 해왔던 관습”으로 고집을 피우겠다면, 여전히 한국의 독자, 신예들도 그들에게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며, 한국인도 그 고독을 해결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만 소리 지르다가, 모두가 공허함을 안은 채 끝나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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