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에 겨우 10번째 한국의 여름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열 번째 여름은 왠지 공기가 눅눅한 느낌이 들고 푹푹 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기간에서의 생활은 정말로 숨 막힐 것 같습니다.
유월 중순쯤에 갑자기 예정없이 베트남에 긴급하게 갔다 왔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몰랐습니다. 2주 후에 한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잘 갔다 왔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통속적으로 고향방문을 갔다 와서 친척들의 집집마다 찾아가서 선물을 드리고 인사를 했는데 이번에 잘 갔다 왔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양파 수확을 한참 하고 있었는데 베트남에 계신 외할아버지께서 위급해서 병원에 계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땐 외할아버지의 모든 기억을 떠오르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인천공항에 바로 갔습니다. 오후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3시간 버스를 탔는데 슬프게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밤을 샜고 동생들과 통화할 때마다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동생이 “누나! 오늘 저녁에 도착을 못 하면 외할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 마음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다른 동생들은 모르지만 저는 외할아버지 기억 속에 각인된 기억이 많습니다. 초등학생 땐 방학 때마다 외할아버지 집에 가서 지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집 주변에 과일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직접 심고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물을 주는 모습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자손들이 나무 밑에서 노는 모습과 과일을 먹는 모습을 보니까 힘이 나고 기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3개월 방학이면 3개월 동안 외할아버지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학교가 저희 집과 너무 멀어 다니기 힘들어서 외할아버지 집에 와서 살았습니다. 그땐 조금 커서 외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해드리고 고등학생 때는 외할아버지께 밥을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안 가는 날에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논에 가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낮엔 외할아버지를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가면 괜찮았는데 저녁에는 아주 어둡고 무서워서 외할아버지보다 앞에 가니까 물고기가 다 도망갔습니다. 그렇지만 외할아버지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웃음만 지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억이 자구 떠올라 밤이 더 긴 것만 같습니다.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외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바로 갔는데 정말 다행히도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제가 혼자 먼 곳에서 사는데 이제라도 볼 수 있으니 정말로 기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년 전 고향방문 때와 이번에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변했고 직접 보니까 참을 수 없어서 계속 울었습니다. 저희 엄마를 쳐다보면 얼마나 속상한지 몰랐습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모르고 “외할아버지가 쓸개 암”이라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기적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위급할 때까지도 자손을 생각하고 “돈은 있냐? 왜 병원에 계속 있냐?”라고 엄마에게 여쭸습니다. 그땐 엄마가 열배 더 슬프고 외할아버지의 병을 숨기고 “아버님이 괜찮아져 며칠 후 퇴원할 수 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쓸쓸한 분위기가 우리 대가족에 몰려 왔습니다.
진짜로 며칠 후에 외할아버지가 집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아서 집에 가지 않고 의사선생님들은 죄송한 말을 하고 편안하게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시라고 했습니다. 엄마, 이모, 외삼촌들이 외할아버지와 119구급차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집에 와서 20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마지막 순간만이 남는다.”라는 베트남 속담이 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장례식 문화는 차이가 많지 않습니다. 베트남에서도 한국과 같이 대부분 3일장을 치릅니다. 친지들이 맞춰 입는 상복은 집안 사정에 따라 생략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는 옛날 한국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꽃상여 뒤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도심에서는 국화모양 조화에 검은 리본을 두른 버스가 영구차를 따릅니다. 이동할 때 곡소리 보다는 피리소리 같은 구슬픈 음악을 연주합니다. 연주소리가 더 커서 곡소리는 묻혀버립니다. 장례식장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밥을 먹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눈물, 웃음소리가 슬픈 공기에 묻혀 엄숙하면서도 시끌벅적합니다. 황천길 가는 길에 편히 가라고 노자 돈과 자동차 모양의 종이를 태웁니다. 옛날엔 말 모양의 종이 인형과 돈을 태웠습니다.
저희 아빠가 불교이고 엄마가 카톨릭이라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완전히 카톨릭 방식으로 실행했습니다. 엄마가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편안하게 가셨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더라도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몰랐습니다. 외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났지만 외할머니는 계속 울고 엄마도 눈물을 멈추지 못해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있어서 한국에 가야했습니다. 지난번 한국에 돌아갔을 때 외할아버지께 인사를 하면 외할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시집간 가족들과 친척들의 안부를 전해준다고 했는데 이번에 외할아버지 제단 앞에서 인사를 하니까 말이 안 나오고 눈물만 흘렀습니다. 이번 고향 방문에 만날 때도 울고 헤어질 때도 눈물을 흘리고 그래도 극복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외할머니와 우리 대가족들은 항상 건강하시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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