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말 중에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은 우리 모든 사람들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게 만들고 사회조직을 이룬다. 국어사전에 보면 사랑이란 상대방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사랑이 거처하는 장소가 우리의 마음이다. 이 마음에 얼마나 사랑이 머물러 있는가는 그 사람의 인품을 만들고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척도가 된다. 사랑 없는 인간관계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향한 나의 마음의 상태이다.
우리 주변에 가슴 아픈 사고와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지구촌에서도 살인과 분쟁과 분열과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 마음에 욕심과 혐오와 증오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이상으로 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대기오염 수치에 대해 이러킁저러킁 말들이 많지만 정작 사람들의 마음이 오염되어 가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어찌보면 환경오염의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의 오염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서도 세상의 마지막에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였다.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타이어에 공기가 빠져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와 같아서 사랑의 특성인 상대방을 향한 배려와 불쌍히 여기며 필요를 따라 돕는 일이 시들해지고 사라진 다는 것이다.
법이 무너지면 그것에 의지하고 지탱해 온 사회는 한 순간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이 식어진 세상을 향해 사람들은 세상 살기가 험하고 힘들다고 표현한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들며 소망과 위로와 믿음을 주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태양빛을 통하여 만물이 힘을 얻듯이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주는 것도 그리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지만 죄를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사랑이란 이름아래 죄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지만 바닷물이 배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은 누가나 가리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사랑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시지만 그 마귀와 타락한 영들과 그에 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용서하시지 않고 준엄한 심판을 하신다. 해와 달이 공존할 수 없고 낮과 밤이 함께 할 수 없는 거와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죄와 허물까지 사랑하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거룩함으로 징벌하신다.
지난주에 서울에서 동성애자들이 모여 축제를 벌였는데 서울시장이 성 소수자들을 우리가 인정해주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하며 허락하였고 작년에 이어 두 번 째인 행사였다. 그런데 문제는 해 마다 그 참가 인원이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전에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벌인 끔찍한 살육의 사건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동성애자들을 향한 총기 사건으로 50명이 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의 주범도 동성애자였다는 말이 나온다. 성 소수자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해주고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악의적인 발상이며 주장이다. 성 소수자들의 종류는 동성애뿐만 아니라 미성년자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아성애와 짐승과도 하는 수성애자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은 분명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불의를 용납하고 인정하며 어울려 지내는 것은 사랑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연약함에 빠져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셨다. 모두가 한 결 같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께로 나와 구원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유독 당대 지도자였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하며 질책을 하셨다. 성전에 올라가서는 예배의 처소를 장사하는 처소로 바꾼 사람들을 책망하시며 노끈으로 그 상을 엎고 팔고 있는 짐승들을 풀어주었는데 사랑으로 충만했던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서 사람들이 놀라 와 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기에 나온 거룩한 분노였다. 사랑은 죄악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타협하지도 굴하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가 사랑이란 미명아래 성소수자들을 받아들이고 활동하도록 멍석을 깔아주고 있지만 참된 사랑이란 무조건 감싸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잘못이라 지적하고 그 길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는 것이다. 사랑이란 여기에 널려있고 저기에 널려 있는 값싼 물건이 아니다. 이제 이 나라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의 회복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모두의 마음에 사랑이 회복되어서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내는 사랑으로 가득한 함양 땅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함양이 의(義) 성읍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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