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의병대장 문태서의 마지막에 대해 접근하기 쉬운 각 종 자료들은 대체적으로 ‘추석 성묘를 위해 함양군 서상면 고향을 찾았다가 서상면장과 그의 꾀임에 빠진 고향친구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헌병대안의분견소로 압송되었다가 진주감옥으로 이송되었고, 대구감옥을 거쳐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고작해야 고증도 명확하지 않고 철지난 경남일보의 단순한 기사와 정확성을 검증할 수 없는 일부 고증이 제시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의병대장 문태서의 마지막이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추론할 수 있는 반박자료는 풍부하게 제시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제시할 수 있는 자료가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라 간접적인 자료여서 추론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대장 문태서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논란이 불가피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는 후속 연구자들과 의병활동을 기억하는 독자들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의병대장 문태서’의 마지막을 재조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 논란을 통해 덕유산 호랑이 의병대장 문태서의 명예가 회복해 주길 강력하게 요청한다. 1. 한민족독립운동사 연표에 ‘문태서 체포 및 순국’는 왜 없을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서 회복하기까지의 주요 사건을 일자별로 정리한 자료가 ‘한민족독립운동사 연표’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연표. 국사편찬위원회. 1994. 1911년 ~1913년의 자료 중에서 의병 관련 내용에는 의병장 뿐만 아니라 일반 의병도 포함되어 있다. 1911년 8월 전후로 기록된 내용 중 의병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 ‘1912년 1. 6. 의병장 崔永宇, 楊平에서 피체. 3. 12. 의병장 朴漢局ㆍ金奉安, 전북 熊浦에서 駐在巡査에 피체. 3. 28. 의병 孫相韓, 수문동 경찰분서에 자수. 3. 31. 의병장 李學士의 참모 鄭世昌ㆍ金學俊, 전북 泰仁에서 泰仁派遣所 헌병에 피체.’등과 같이 의병에 관한 내용들이 세세하게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문태서 체포 및 순국’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이원역 습격 및 소각’으로 일본을 놀라게 했던 의병대장 문태서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면 필히 포함시켰을 것인데 연표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체포와 순국’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2. 일본군경은‘문태서 체포 및 사망’기록을 왜 남기지 못했을까?   일본군경은 의병진압과 관련된 기록을 여러 가지로 남겼다. 경찰조직에서 작성한‘폭도에 관한 편책’, 헌병대에서 작성한 보고서인 ‘폭도봉기의 건’, 일본군이 작성한 전투일지, 일본군토벌대가 작성한 일지 등 다양한 문서들이 있다. 일본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을 수 있는 ‘밀대일기’는 한국에 파견된 일본군토벌대가 작성한 대표적인 전투일지이다. 이 자료에는 문태서와 벌인 전투기록은 있으나, 문태서 체포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른 자료 어디에서도 문태서 체포, 사살 등과 같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만약 문태서를 체포했거나 사살했다면 반드시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3. 문태서가 황해도와 함양에서 체포되었다는 기사는 왜 공식 기록에서 빠졌을까?   1911년 10월 12일 매일신보 2면에 황해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장 문태서를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신문아카이브, ‘황해적괴 체포’, 대한매일신보, 19111012. 그리고 1911년 10월 27일 경남일보에는 8월에 문태서가 체포되었다는 때늦은 기사가 실렸다. 한국신문아카이브, ‘문적포로상황(文賊捕擄狀況)’,경남일보. 1911.10.27. ‘어제 체포되었다’고 보도한 10월 12일자 기사와 2개월도 훨씬 더 지난 체포기사 중 어느 기사를 신뢰할 수 있겠는지는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 연표에 등재되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두 기사 모두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문태서 체포 및 순국’을 실제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4. 문태서 숙부는 왜 문태서 시신을 보지 못했을까?   김성진이 쓴 ‘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에 따르면 후손들의 진술을 근거로‘문태서는 서울감옥에서 순국하였으며, 유해는 감히 인수할 사람이 없어서 형리들이 서울 공덕동 뒷산에 묻었다’고 하였다.’이후 문태서 숙부가 나무로 위패를 만들어 무덤앞에 묻어 장소를 표시해두었으나, 일제 36년간의 감시와 후손들에게 닥친 고난으로 묘지를 분실했으며, 이후 고향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는 것이 문태서 사후에 대한 기록이다.   일본의 침략에 항거했던 많은 의병장들의 후손들이 일제로부터 갖은 핍박을 당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타향으로 이주하거나 만주로 건너갔다. 일본군경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덕유산호랑이 의병대장 문태서’후손들이 당했을 고초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친인척들은‘문태서 체포 및 순국’을 사실로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 결과가 시신 인수 실패, 묘지 망실, 가묘 설치 등으로 나타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5. 문태서 3남 은 왜 만주로 갔을까? 문태서는 자녀로 3남을 두었다. 남평문씨 대동보에는 택주, 학주 2명의 아들이 있으나, 손자 문경용씨의 진술에 의하면 막내 옥주가 있었다. 택주와 학주는 신분을 숨긴 채 국내에서 궁핍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막내 옥주는 만주로 건너갔다고 필자에게 설명했다. 만주에 건너간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막내 옥주는 형들을 버리고 왜 만주로 갔을까? 옥주가 만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어떤 연줄이 있어야 했을 것이며, 우리는 그 연줄이 의병활동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문태서의 국제감각과 국내정보 수집능력을 고려한다면 문태서가 국내의병활동을 마무리하고 활동근거지를 국외로 옮겼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6. 최영내가 의병들을 체포해 안의분견대에 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문태서는 몰랐을까?   당시 서상면장이었던 최영내는 주민들과 합세하여 의병들을 체포해서 안의헌병분견소에 넘긴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의병편Ⅹ (二) 二月, 경상도, 韓憲警乙 第一六五號 경남일보 기사에 의하면 서상면장 최영내는 앞의 사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문태서를 체포하여 안의헌병분견소에 넘겼다. 그리고 최영내는 또다른 의병 2명을 체포하면서 상해치사를 하여 1913년 9월 폭행치사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최영내는 서상면장으로 계속 근무하면서 일제로부터 표창장을 2회나 받았다. 이러한 악질 친일분자를 문태서가 모르고 있었을까? 문태서 고향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출신인 면장 최영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문태서가 성묘를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주막에서 최영내에게 체포되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고 믿으란 말인가? 7. 너무나도 뻔한 항일지도자 체포과정으로 신출귀몰하고 보안에 철저한 문태서를 체포했다?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관군에 쫓겨다니다가 전남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12월 2일에는 순창 피노리에 도착했다. 태인에 머무르고 있던 김개남을 찾아가던 도중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순창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의 고발로 주막에서 저녁을 먹던 중 체포되었다. 또다른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도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에서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지역 유학자인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황헌주가 이끌고 온 70여명의 관군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경북에서 활동한 의병장 신돌석의 고종형제 김자성(金自聖)이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삼형제가 도끼로 쳐죽였다고 하며 신돌석의 유해를 들어옮기고 일본 헌병대에 발고하였으나 생포하지 않고 살해 후 발고하였다는 까닭으로 일본 헌병대로부터 퇴짜를 맞고 현상금을 받는 데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체포되는 과정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앞에서 연재한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태서는 자기 신변보호에 철두철미하였으며, 밤 12시경에 잠자리를 옮길 정도로 항상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군경조차도 문태서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추석에 성묘하러 고향을 방문하고, 사람들의 내왕이 많은 주막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황당한 행적을 보였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너무나 뻔한 이야기로 ‘문태서 체포 및 순국’을 그려냈다고 주장한다면 필자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문태서 의병대장이 1909년 10월 29일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이후 역사의 기록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일본군경의 공식문건에서 문태서를 언급한 자료는 27건이며, 대부분은 문태서의 근황에 대한 보고, 문태서의 행방묘연, 문태서 부하들의 소소한 약탈행위 등이다. 일본군경은 문태서가 덕유산을 중심으로 하는 근거지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1910년 7월 이후에는 일본측의 어떤 기록에서도 문태서를 찾을 수 없다. 말 그대로 홀연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연구자가 탐색한 어떤 자료에서도 1910년 7월 이후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1911년 10월에 대한매일신보와 경남일보에 확인할 수 없는 문태서 체포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연구자는 문태서 의병대장은 결코 체포되지 않았으며, 다만 홀연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확신한다. 앞으로 더 훌륭한 연구자들이 나와 문태서의 행적을 밝혀주길 기대해 본다.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연표. 국사편찬위원회. 1994.2) 한국신문아카이브, ‘황해적괴 체포’, 대한매일신보, 19111012.3) 한국신문아카이브, ‘문적포로상황(文賊捕擄狀況)’ ,경남일보. 1911.10.27.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의병편Ⅹ (二) 二月, 경상도, 韓憲警乙 第一六五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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