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문태서 의병부대가 사용한 무기와 확보 방법 및 운용   10회에서 살펴본 ‘영각사 전투’는 문태서 의병부대와 일본군경간에 벌어진 총격전이었다. 이 전투 외에도 일본군경과의 대부분 전투는 총격전이었다. 일본군경과의 전투 외에는 총격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으므로 휴대에 필요한 군도와 화승총 등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문태서 의병부대가 사용한 무기는 소총과 군도로 한정지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소총은 뇌관형 신식총(서양총, 일제총 등)과 화승총(심지로 불을 붙여 총알을 발사하는 총) 2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군도는 대체로 가벼운 일본군도를 사용하고 있다. 무기 확보 방법은 문태서 의병부대가 사용하였던 무기 중 뇌관형 신식총에 한정하여 살펴보고, 운용방법에서는 신식총과 화승총을 모두 살펴보고자 한다. 무기 확보 방법 조선은 왜란 도중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모방하여 개조하거나 일본군 귀순자들 중 조총 제작 기술을 가진 자들을 우대하고, 명나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화승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1)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의병들이 보여준 전투력을 인정하여 민간인들의 무기 소유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승총과 군용칼 등은 민간인들이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1907년 9월 6일자로 ‘총포 급 화약단속법’을 시행하여 민간인들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 등을 압수하여 소각하거나 폐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승총과 군도가 많았다. 징발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들은 대부분 죽창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이러한 상황은 초기 의병부대들에게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초기 의병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앞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병들이 총으로 무장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일 자각한 의병지도자들은 소총부대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민간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승총을 강제로 징발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문태서 의병부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문태서는 4년가량 활동하면서 수십여 차례의 군수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에는 군자금은 물론 식량과 무기도 포함되어 있었다.2) 문태수의 부하 김치삼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김치삼 판결문에는 ‘1907. 10. 3 柳志明 丁成一 등 30餘名과 함께 抗日鬪爭을 起義한 후 銃劍을 携帶하고 龍潭邑內를 襲擊하여 日人 2名을 射殺하고 日人 5名과 韓人 1名에게 重輕傷을 입힌 後 洋銃 2挺을 取하는 등 抗日鬪爭을 하다...’3)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총기징발에 참여한 이창석의 판결문에도 ‘명치 40년 음력 3월 9일에 총기(銃器)를 휴대하고, 금산군 군북면(郡北面) 한우리(閑佑里) 김경서(金京西)의 가택에 돌입하여 총을 사용하여 가인(家人)들이 도주한 틈을 이용하여 집 안을 수색하여 총 1정, 옷 상·하(上下) 각 1벌, 키 20개를 겁취하였다.’4)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신갑록 등의 재판기록에서도 징발을 통한 병기확보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다. 탈취 1907년 2월 12일 양현규가 이끄는 의병부대들이 남원진위대를 습격하여 진위대에 보관되어 있던 양총 100여졍과 실탄을 탈취하였다.5)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유선장과 진문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광무(光武) 10년 음력 12월 30일 밤에 폭도 수괴 양문찬(梁文賛) 이하 약 60명과 공모하고 병기(兵器), 탄약(彈藥)을 강탈할 목적으로써 총 약 40정을 휴대하고 이를 사용하여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南原) 진위대(鎭衛隊)를 습격하고 총기(銃器) 약 200정을 겁취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6) 정미 의병전쟁 직전에 벌어진 대규모 무기탈취 사건으로 이 사건 해결을 위해 특별 조사팀까지 중앙에서 파견하였다.7)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화기는 신식무기인 러시아제 소총인 모젤 총이나, 일본제 무라타(村田) 소총이었다. 당시 탈취된 총기와 탄약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후 신식 소총을 다룰 줄 아는 의병부대들에게 분배되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다. 해당 지역에서 7월 하순에 거병한 김동신 의병부대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김동신과 함께 다니고 있던 문태서 소총부대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태서는 무기 확보를 위해 주재소를 자주 습격하였으며 상당한 전과를 거두고 있다.8) 김성진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읍 주재소 및 군청 습격, 무주 주재소 습격, 안의 주재소 습격’ 등을 통해 일본군경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하고 있다. 구입 국내외 정세 판단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문태서는9)10) 사용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직접 나선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1908년 3월 ‘영각사 전투’이후 농사철 기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던 문태서는11) 11월 하순경에 종적을 감추었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 李斗璜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지난 달 하순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문태서가 종적을 감추었는데 이를 조사하는 중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서울에 올라간 듯하다. 서울에 올라간 목적은 탄약을 매입하기 위해서 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계속 사실을 확인중에 있다.’12) 문태서는 1909년 4월 5일 부하 한 명을 대동한 상태에서 전북 금산군 富東面 水通洞에 도착, 여비 부족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식사를 제공받았는데 이때 본인이 경성에서 돌아오는 길임을 밝혔다.13) 두 사건은 정황상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문태서는 작년 11월 서울에 올라가 무기 구입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를 마무리 한 후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입한 무기를 사용할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기록14)과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문태서는 무기구입을 위해 직접 상해로 건너갔다는 신문 보도 기록도 존재하고 있다. 무기 운용을 위한 노력 신식총이든 화승총이든 총알이 있어야 하고, 화약을 제조할 수 있어야하며, 총기가 파손되면 수리해야만 한다. 덕유산 깊은 골짜기에 근거지를 두고 있더라도 전문 기술자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재료를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문태서 의병부대는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인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자체적으로 총기 사용에 필요한 운용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문태서 의병부대에는 화약을 제조하고 총을 수리할 줄 아는 이들을 부하로 삼아 의진 운영에 활용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비교적 일본군경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자들이었다. 문태서 의병부대를 위해 화약을 제조하고 총기를 수리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명경안은 직업이 목수였다.「判決文」을 보면, 명경안은 이용이와 함께 문태수의 부하인 金尙鎭(전상범 오기)의 의뢰를 받고, 1908년 2월 그믐날로부터 1909년 3월 2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繼續意思’로써 화약 75근을 제조하여 공급하였으며, 1909년 2월 5일 화약 3근을 제조하고, 또 총 2정을 수리하여 공급하였다.15) 문태서가 해당 지역에서 대단한 신망을 받으면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대장이었기에 평범한 일상 생활을 하면서 문태서 의병부대를 위해 화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모으고, 병기수리를 도왔던 드러나지 않은 많은 조력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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