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 문태서와 김동신 의병부대,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소총부대를 운영하다.  김동신은 1907년 9월 10일 순창읍 공격을 시작으로 1907년 9월에서 1908년 4월까지 80명 ~ 100명 규모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 헌병대 분파소, 일본군 토벌대, 경찰서 순사대, 수비대 등 일본군경 치안조직을 활발하게 공격하였다.1) 일본군경의 모습만 보고도 도망치기만 했던 무기력한 의병집단이 아니라 일본군경을 상대로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는 전투력을 가진 의병부대로 변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우리는 김동신 의병부대가 일본군경과 대등한 무장을 했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벌어진 전투가 대체로 유격전 형태로 진행되었으므로 무장은 아마 소총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기록이 이 해석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중 가장 믿을만한 기록이 전라북도 금산경찰서(당시 금산군은 전락북도 소속)가 보고한 금경발 제40호(錦警發 第四○號)이다. 김동신과 문태서의 이름이 공식적인 문건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최초의 문건이자, 등장하는 의병들 대부분이 서양 신식총과 화승총을 들고 있었다는 금산경찰서 보고서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2) (중략) 지역주민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1월 20일 오후 8시경 안성 이안면 시장에 폭도 40명의 일행과 30명의 일행이 와서 주민들에게 술과 음식을 달라고 하여 먹고 마신 후 그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일안면 방면으로 갔다. 그 두목의 성명은 문태수와 김동신이며 화승총 오십여정과 양총 10여정을 소지하고 있었다. 지역주민들에게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정찰대는 1월 21일에 추적을 시작하였으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적들은 이안면 시장에서 식사 후 1~2시간 휴식을 취하고 안성 일안면 삼공리에서 덕유산을 넘어 경상남도 안의지방으로 향했으나 별로 민가에 해를 끼친 흔적이 없었다.3) (중략) 위 기록에 따르면 문태서가 이끄는 40여명의 의병부대와 김동신이 이끄는 30여명의 의병부대가 안성군 이안면 시장에 동시에 들렀다. 두 사람이 같은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의병들 대부분이 총기로 무장하고 있음으로 보아 ‘소총부대’를 운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월 20일 시장에 들러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후 안의로 향했다는 기록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문태서와 김동신 의병부대는 무주군 안성면과 거창군 북상면 함양군 서상면, 장수군 장계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덕유산 향적봉과 남덕유산 사이에 근거지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이곳은 매우 험준한 지역으로 이곳에 들어오는 길은 서상면에서 영각사를 거쳐 들어오거나 거창군 북상면 소재지에서 매우 깊은 골짜기를 거쳐야 하는 방벙 외에는 없다. 어느 곳이든지 움직임이 높은 산에 자리잡은 정찰병에 의해 감지될 수 밖에 없다. 김동신과 일본군 토벌대는 이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두 번이나 벌렸다.4) 안의군 월성계곡(현 거창군 북상면)에서 벌어진 1차 전투에서는 의병 600명이 동원되었으며, 거창군 매학동(현 거창군 고제면)에서 벌어진 2차 전투에서는 의병 800병이 동원되었다. 이 두 전투는 문태서 김동진 의병부대가 근거지를 사수하기 위해 벌어진 정규전 규모의 전투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에서 살펴본 두 기록 외에도 많은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김동신과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부대들은 일본군 토벌대들과 대규모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소총부대를 운영하면서 전술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문태서! 호남을 대표하여 소총부대를 이끌고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5)’에 참가하다.‘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은 대한제국 말기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던 전국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서울로 쳐들어가려던 대규모 의병전쟁이다. 1907년 12월 말에서 1908년 1월 말 사이에 벌어졌던 이 작전을 통해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이후 조직된 의병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여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고자 했다. 13도 창의군은 약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충청북도, 강원도, 경기도 일대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모으기로 했으며, 기타 지역은 지역 대표성을 갖추기 위하여 전투력이 뛰어난 소수 부대가 참가하기로 결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6) 지리산과 덕유산을 근거지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활동영역으로 하고 있던 김동신 의병부대에서는 위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별도의 부대를 구성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휘하 주요 지휘관 중 김동신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명망을 쌓고 있던 문태서를 파견부대 지휘관으로 지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말 타는 능력이 뛰어나 호남을 자유롭고 빠르게 왕래하고 있었으며, 해산군인 출신으로서 소총부대 운영능력이 뛰어났고 전투실적 또한 화려했기 때문이다. 김동신은 13도 창의대장 이인영에게 호남을 대표하여 문태서가 이끄는 소총부대가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다고 통보하였을 것이다.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받은 이인영은 각도의 의병장들과 상의하여 각각 진호(陣號)를 내리고, 각 군의 칭호를 정하여 아래 표와 같이 전국 연합 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하였다.7) 그런데 편성을 보면 사건과 가장 가까운 사료인 ‘이인영 문답조서(1909.06.21.)’에는 13도 연합 의병부대의 진호와 부서가 위 표 왼쪽과 같고, 그보다 후기에 속하는 사료 ‘기려수필(騎驢隨筆)’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9월 21일자’에는 오른쪽과 같이 나타난다. 전기 자료와 후기 자료 간의 차이는 초기에 편성된 진호와 부서가 나중에 개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13도 연합 의병부대 개편과정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용장 신돌석은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은 유생 의병장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신돌석은 평민출신이어서 배제되었음을 많은 자료들이 서술하고 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표에서 중요한 기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호남창의대장 문태서’가 전기와 후기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문태서의 신분이 일반 평민이었거나 평범한 유생이었다면 신돌석처럼 후기 개편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태서의 출신이 해산군인이었기 때문에 무반출신 양반으로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4회부터 7회까지의 긴 여정을 거쳐서 문태서는 역사적인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서 ‘전라유진소 전라창의대장 문태서’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문태서는 파견부대를 꾸려 서울로 향하게 된다. 문태서와 그 의병부대가 서울과 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실제로 참가했는지 여부는 논란이 많은 사항이다.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는 주장, 서울로 올라가다가 일본군경에게 막혔다는 주장, 서울로 올라가다가 경북의 ‘교남창의대장 신돌석’이 부대개편과정에서 평민이라는 이유로 배제됨을 알고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의 한계성을 파악하고 도로 돌아왔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함양 출신 문태서가 어떻게 ‘전라유진소 전라창의대장 문태수(본명 : 태현)’이 되었을까? 라는 물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서 사용된 문태서 직함은 전기에는 ‘전라차의대장’, 후기에는 ‘호남의병대장’이었다. 필자는 ‘의병대장 문태서’의 기본 정신을 살리고자 후기 직함인 ‘호남의병대장 문태서’로 정리하고자 한다.     1) 홍영기, 『구한말 김동신 의병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보56, 일지사, 1989. p 119 ‘김동신 의병의 주요 반일전쟁활동’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 의병편Ⅰ(一) 一月, 全羅道 錦警發 第四○號3) 덕유산 줄기를 사이에 둔 전북 장수 안성과 경남 안의 월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있었으며, 행군함에 있어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 의병편Ⅳ (二) 六月, 忠淸道 2. 大警發 秘 第三七號5) 이 사건에 대한 명칭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 동일 사건에 대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연구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으로 정의한다. 6)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한국광복군 Ⅱ 韓國光復軍小史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Ⅰ-Ⅱ-5-3) 서울 진공작전과 유생 의병장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편 한국사 Ⅳ-4-1)-(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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