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정경운(1556~1610년)은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진양이고 자는 덕옹이며 호는 孤臺(고대)이다. 1556년(명종 11) 2월 29일 경상남도 함양읍 백연리 돌뿍에서 태어나고 집안은 나름 부유했지만, 외가에서 돌봄을 받는 아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살 때 아버지(정율: 승문원 부정자를 역임)를 여의고, 외조부께 의지하여 길러졌는데, 9살 때 외조부 또한 돌아가시고, 13세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어 고아가 되었으므로 맏형을 아버지와 같이 의지했으나, 형 또한 19세에 잃고, 15세부터 24세까지 형수를 부모님으로 모시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공의 집안을 살펴보면 할아버지 당곡 정희보는 대학자로서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주름잡는 쟁쟁한 학자들을 길러 내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옥계 노진, 구졸암 양희, 청련 이후백, 개암 강익이다. 함양의 역사 이래 천령(옛 함양의 지명) 삼걸이라 추앙받는 세 분인 옥계, 청련. 구졸암이 모두 할아버지 당곡 정희보의 제자들이고,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남계서원을 세우고 초대 회장을 지낸 이가 그의 제자인 개암 강익이다. 정경운 선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연히 의병을 일으켰고, 스스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는 의병장이 되어,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의 희생적인 의병활동은 전국방방곡곡에서 구국의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업적을 선보인 경상도 의병의 기폭제가 되게 하였으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였다. 정규군이 아닌 민초들로 만들어진 의병은 전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구국의 결단이자 행동이었다. 또한 정경운 선생은 국난극복에 큰 힘을 보태면서 ≪고대일록≫이라는 기록물을 남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다수의 문헌이 존재하지만 가치만큼이나 대우받는 기록물이 있고,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는 안타까운 문헌도 존재하기에 ≪고대일록≫이라는 문헌을 소개하고 싶다. 임진왜란사의 대표적인 문헌으로 징비록, 난중일기, 간양록 등이 있다. 징비록은 류성룡 이라는 고급공무원이 쓴 글이고, 난중일기는 이순신 이라는 걸출한 장수의 작품이고, 간양록은 포로 신분으로 쓴 글로써 역사적으로 귀하신 몸값을 제대로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고대일록≫은 같은 임진왜란을 다룬 여러 다양성이 존중되는 책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밑바닥 삶을 사는 민초들의 참사를 진솔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담았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저자인 정경운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향촌 선비이고 가족사로는 불우했지만, 나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터지자 의병장이 되어 정인홍과 함께 국란극복에 힘을 보탰고, 우리가 속속들이 알지 못했던 의병의 활약상을 기록함으로서 다른 문헌들과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의병으로 전쟁에 참가한 실질적 체험자로서 눈앞에서 목격한 왜놈들의 모습과 그들이 저지런 수탈과 만행을 가장 입체적이고 생동감있게 그려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드러난 조선의 사회상은 정경운 개인이 처한 비극만큼이나 끔찍하고 참혹하다. 전쟁을 겪는 동안 처가 식구들이 굶어 죽거나 자신의 자식들이 죽어나가 일기 곳곳에다 구구절절 슬픔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이런 고역스런 모습이 그나마 부유한 시골 선비의 참상이었기에 가난한 민초들의 삶은 더 비참하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생활이었슴을 상기해야 한다. 책 속에는 전쟁 중 조선의 지방관들이나 일부 장수들의 백성에 대한 수탈과 원조를 왔던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를 왜놈들보다 더했다고 매우 세세하고 현실성 있게 직시했다. 임진왜란 중에 생겨난 말 중에서 “왜적이 끼친 피해는 얼레빗과 같고, 조선을 구하러 온 명나라 군사가 끼친 피해는 참빗과 같고, 조선 관료들이 끼친 피해는 훨씬 더하다.” 라는 말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어느 책에서 순수하게 백성들의 처지에서 과감하고 정확한 진솔된 진면목을 적은 글을 찾아 볼 수가 있겠는가? 책의 내용 중 향한 바는 오로지 백성의 편에서 같이 아파하고 부대끼면서 백성만을 생각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왜놈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섰다. 특히 왜놈들이 함양으로 온다는 소식에 맏딸에게는 칼을 쥐어 주며 왜놈에게 당할 순간이 오면 자결을 하라고 교육했으며, 그 때부터 딸은 세수도 머리도 안 감고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함양이 왜놈에게 점령당하고 피란을 간 맏딸이 왜놈을 마주한 마지막 순간. 그 칼을 빼어 들고 호통을 쳤으며 결국은 칼을 쥔 자세로 죽음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조선시대 명문 사대부 가문의 선비로서의 기개와 실천의 삶을 교육하며 행동했던 “언행일치” 생을 살았던 한 시대의 스승이었기에 ≪고대일록≫의 가치를 더 높이 사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의병들의 업적으로 나라를 구하였으나, 기록이 거의 없어 묻힐 뻔한 의병활동은 고대 선생이 쓴 ≪고대일록≫ 을 통해 관군보다 의병의 활약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고대일록: 1592년(선조 25)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즉위년) 10월 7일까지 18년간 경남 함양에서 체험한 내용을 일기형식으로 쓴 글이다.(4권 4책 필사본 514쪽) 특히 자신이 소모관으로 활약한 의병장 정인홍을 중심으로 김면, 조종도, 곽준, 이대기 등의 활동 및 전쟁의 참상과 이순신, 김덕령, 명군 등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 원본<고대일록>은 초서체로 쓴 것인데, 8세손 정동규가 어려운 초서체를 읽기 쉬운 해서체로 바꾸어 필사를 하여 새로운 책으로 정리를 하였다.그러나 9세손 정용호 대에 와서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큰 불이 나서 원본은 소실되었다. 다행히 미리 필사를 하여둔 8세손 정동규의 덕분으로 <고대일록>이 전해진다. 고대일록에는 고대, 소고대 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함양인 이라면 “대고대(구졸암 양희의 비문과 정각이 있는 곳)” 는 알아도 “소고대” 는 생소해한다. 이 소고대가 고대 정경운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노닐며 벗들과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이며 ≪고대일록≫ 을 기록했던 곳이다. 함양군지에도 “대교대는 군 동쪽 이십 리 거리의 남계천 속에 있다. 소고대는 군 서쪽 일리 거리의 뇌계 속에 있는데, 신해년 큰물에 떠내려가고 형체가 없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사라진 고대 정경운 선생의 발자취를 남긴 ≪소고대≫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윗담으로 자리를 잡았다. 진양 정씨 후손들은 목현의 윗담 산언덕아래에 “小孤臺” (소고대) 석판을 붙이고, “고대정” 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다리 이름을 소고대교로 명명했다. 또한 소고대 위에 선생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사적비를 세우고 공의 행적을 기록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