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남계서원의 창건자 개암 강익 선생이 탄신 50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지난 5월 6일 남계서원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계서원 창건 주역인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해 온 개암 강익 선생이 각고의 노력으로 남계서원을 창건하기까지, 그의 노력과 남계서원 창건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개암 강익의 어제 개암 강익(介庵 姜翼) 선생은 1523년 함양군 수동면 효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근우, 어머니는 남원양씨 일로당 양관 선생의 손녀이다. 15세 때 학문에 뜻을 둔 후, 10년 뒤 소과에 급제하였으나 대과로 나아가지 않고 효리마을에 숙야재를 짓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집중했다. 개암은 당곡 정희보, 남명 조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옥계, 임남계, 오덕계, 양구졸암, 이청년 등의 벗이 있었다. 1552년 30세에 거창 북상 갈천 임훈 선생(천령서원수곡통문)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박승임 노관 임희무 정복현과 함께 서원 창건에 뜻을 둔 뒤, 39세인 1561년(10년) 서원을 완공하였으며, 남계서원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566년 남계서원이 사액을 받고 이듬해 45세로 생을 마감했다.남계서원이 창건되기까지강익은 ‘무너져 가는 도심(道心)을 회복하고, 명성(明誠)을 갖춘 선비 육성’을 위해 전국 두 번째로 남계서원을 창건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강익은 1552년 남계서원 건립을 위해 함양군수와 지역의 여러 선비들과 힘을 모아 서원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여러 상황으로 인하여 서원건립이 중단된다. 서원건립이 중단되고 1553년 강익은 지리산을 유람하다 마천면 창원마을(당시 등구동)에 매료되어 이곳에 양진재를 짓고 이곳에서 성령(性靈) 함양, 신독(愼獨), 강학(講學)했다. 7년간 양진재에 머무르며 정신적 지주로서 유생들에게 학문도 가르치던 강익은 1559년 함양군 신임군수로 부임한 윤확의 협조로 서원 건립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됐다. 남계서원은 개암 선생과 유림의 노력으로 건립 시작 10년만인 1561년 완공된다. 남계서원이 갖는 의미남계서원은 인근의 유림들과 당시 군수 3명(서구연, 윤확, 김우홍)과 함께 10년간 공들여(1552~1561년) 세웠으며 전국 1,000여 개 서원의 근본이 되고 있다.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의 뒷쪽에 배치하고 강학 공간은 서원의 앞쪽에 자리 잡아 창건되어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초기배치 형석의 전형을 보여준다. 강익은 남계서원 건물에 명명하여 강당을 명성(明誠-밝아지면 정성스러워 진다)이라 편액하고, 명성 왼쪽의 재를 거경(居敬) 명성 오른쪽의 재를 집의(集義), 거경 앞의 재를 양정(養正)·헌(軒)을 애련(愛建), 집의 앞의 재를 보인(補仁)·헌을 영매(味梅), 대문을 준도(遵道, 도를 따르는 문)라 했다.남계서원은 전국의 9개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2019년 등재됐으며 경남에서 유일하다. 남계서원 창건 ‘부보록(裒寶錄)’에는 남계서원이 건립되던 당시부터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책이나 재물을 기부한 사람과 기부 내역이 상세히 적혀있다.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행사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는 남계서원 주관, 개암기념사업추진위원회 후원으로 열렸다. 남계서원이 많은 사람의 힘으로 창건된 것처럼 개암강익선생탄신5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개암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기념행사도 창건 당시의 취지에 맞게 서부경남(함양·산청·거창·합천·진주 등)과 대전 및 임실군의 유림·문화예술단체·서원·군민, 남계서원 창건 동지(지원) 성씨, 진주강씨 5개 지파 전국의 130만, 남명 조식의 문인(제자) 후손 등 희망자로 구성했다. 지난해 8월부터 추진위원회 강안구·강덕희·강민구는 전국을 다니며 남계서원 알리기, 창건 주역 알리기와 탄신 기념행사를 홍보하고 동참서를 받았다. 그 노력으로 남계서원과 창건 주역 개암 강익이 널리 알려졌다. 5월 6일 남계서원에서 열린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에는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800여 분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탄신 500주년 행사에 앞서 식전행사로 풍영루 누각에서 이성훈팀의 무형문화재 동래학춤과 박행달팀의 시낭송이 펼쳐졌다. 동래학춤은 서원창건에 45세 인생을 바친 개암 선생께 드리는 헌무이며, 또 개암 자신이 만든 서원에서 직접 춤을 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기념행사는 탄신제, 기념식, 기념식수(풍영루 동남 11시 방향 50m 지점에 은행나무 심었음), 학술발표에 이어 함양 휴천면 개암 묘소 참배로 마무리했다. 탄신제는 초헌관 최종수 성균관장, 아헌관 조종명 남명조식 후손, 종헌관 강대수 전 함양군진주강씨종회장이 맡았다. 명성당에서 열린 학술대회는 사회 김윤수교수, 주제발표는 정우락·최석기·이해준·함영대교수가 참여하여 개암 강익의 삶, 교육사상, 남계서원의 선비육성 지향이념에 대한 심층적인 토론이 있었다.이날 개암강익선생탄신5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를 개암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 정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추진키로 했다. 개암 강익의 꿈 그리고 내일“물아 어디로 가느냐 갈 길 멀었서라온 세상을 다 채워서 지나가도다 여흘여흘바다에 미쳐 이르기 전이야 그칠줄이 있으랴”개암집(介庵集) 단가삼결(短歌三闋)에 수록된 강익의 단가 3수 중 일부이다. 논어 헌문편 “옛날에는 자기를 위해 배웠는데, 오늘날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배운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에서 밝힌 공자의 말씀을 새겨,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해 온 강익의 삶과도 꼭 같은 시구이다.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행사에 내린 비가 만물을 살리는 생명수였듯, 낮게 겸손하게 그러나 쉼 없이 흐르는 물은 개암 강익과 닮았다.   개암은 명예·출세보다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도심(道心) 회복과 일두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남계서원을 창건했다.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계서원의 무게감을 인식하고 서원의 본래 기능을 회복·복원하여 많은 사람이 그 가치를 찾도록 해야 하며 개암 강익의 삶과 사상, 꿈과 희망을 재조명해야 한다.탄신 500주년을 계기로 가뭄 해갈의 단비와 함께 온 세상에 전해진 개암의 꿈 희망인 남계서원의 ‘명성(明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 진다.(중용)’는 메시지가 또 다른 시작이 되어 남계서원에서 다시 꽃피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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