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양자역학과 카오스라는 두 주제에 걸쳐 자연은 우리에게 친근하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또 작동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자의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에서 존재들은 정확히 규정될 수 없으며 확률적 방식으로만 예측가능하다. 또 행성의 공전이나 특별한 모양의 당구대에서 움직이는 당구공처럼 매우 단순한 시스템에서도 예측불가능성한 카오스(혼돈)가 존재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처럼 뉴턴 역학의 틀 안에서 간결하게 기술될 수 있는 운동 안에 카오스가 있다는 것은 우리 경험의 많은 부분이 불확실성 가운데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황은 앞의 글에서처럼 그리 간결하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여러 조직들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그 조직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조직의 구조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에서 기존 과학이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컴퓨터의 도입으로 계산능력이 크게 진보하면서 단순성을 기초로 했던 과학의 범위를 훌쩍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 영역이 바로 ‘복잡계(complex system)’이다. 사실 이전의 과학은 어떤 상황에서든 대상을 단순화함으로써 체계적인 방정식을 세우고 그 해(solution)를 통해 대상의 변화를 예측해 왔지만 복잡계의 경우 단순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정확한 방정식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복잡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모형을 설계함으로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더라도 변화의 과정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복잡계는 가상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조직 체계들이다. 세포로 이루어진 우리의 신체, 다양한 생명과 비생명들로 구성된 생태계, 여러 업무들로 나누어진 우리의 직장, 다양한 생각과 행위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 등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우리의 경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복잡계이다. 즉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과학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간단하고 이상적인 상황을 넘어 우리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현실적 상황에 근접한 현상들을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complexity)’라는 주제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주제는 이미 오래전 이 지면에서 ‘복잡계 물리학과 학문의 통섭’이란 제목으로 운을 띠운 바 있다. 앞으로의 글들은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 소개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또 바로 전에 소개했던 카오스 이론이 복잡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바탕 지식이 된다는 것도 디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나비효과’, ‘비선형적 상호작용’, ‘프랙털 기하학’ 등은 복잡계에서도 매우 핵심적인 현상이자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이 분야의 선도적 연구자인 미첼 월드롭은 저서『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원서의 제목은『Complexity』이다.)의 서문에서 기존의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여러 문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 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구소련의 주도권이 1989년 갑자기 몇 달 만에 붕괴하였고, 또 2년도 채 못 되어 구소련 자체가 분열되었는가?- 왜 1987년 10월 어느 월요일 주식시장의 주가지수가 500 포인트 이상 급락했는가?- 왜 생물 종들과 생태계는 수백만 년 동안 안정되게 생존하기도 하고 어느 한 순간에 멸종되거나 새롭게 변형되었는가? - 정신은 무엇인가? 어떻게 1.3kg의 물질 덩어리인 뇌가 감정, 사고, 의도, 인식 등과 같은 불가사의한 성질을 창출하는가?- 왜 이 세상에는 항상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등이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이 사실은 공통점이 있으며 이들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과학적 원리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복잡계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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