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살이 우리는 함양인입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100% 국내 생산’ 낚싯대 제조 외곬 40년 ‘낚싯대 제조, 100% 국내 생산.’ YGF라는 자사 브랜드로 낚싯대를 만드는 영규산업 이수영(64) 대표이사의 명함에 새겨진 문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찍이 밥벌이를 찾아 나섰다”는 이 대표는 낚싯대 제조공장 심부름꾼으로 시작해 40년 동안 낚싯대 제조 장인의 한길을 걷고 있다.열여섯 어린 나이에 상경이 대표는 병곡면 송평리 송평마을에서 태어나 병곡초등학교를 졸업(제31회) 했다. 4남1녀의 장남인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모교인 병곡초등학교에 급사로 들어갔다. 급사는 학교 시설물이나 기물을 고치고 관리하는 소사의 보조역할이다. 모교에서 1년 반을 급사로 일했다.이 대표가 낚싯대 제조에 발을 디딘 건 이모부와의 인연이다. 추석 때 놀러온 외사촌 형을 따라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낚싯대 생산기술을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모부의 소개로 우리나라 낚싯대 제조 1호 기업인 오리엔탈에 입사했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붙임성도 좋아 형들과 누나들은 어린 이 대표를 동생처럼 챙겼다고 한다. 이 대표는 공장에서 잔심부름 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가 손재주도 있어서 한번 보고 배운 것은 비슷하게 만들어 낼 줄 알았다고 한다. 이 대표는 숙련공인 형과 누나들로부터 낚싯대 만드는 기술을 하나하나 익혔다. 일정기간이 지난 뒤 그는 생산라인에 투입됐다. 그러면서도 다른 공정의 기술도 틈틈이 배워 기술을 축적했다. 언제나 아침 7시 이전에 출근했다. 공장문은 이 대표가 도맡아 열었다. 형과 누나들이 출근하기 전에 먼저 작업 준비를 마쳤다. 밤 10시 퇴근은 기본이었다. 낚싯대 제조공장 근무 5년 만에 130공정이 넘는 모든 기술을 습득했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저절로 몸값도 뛰었다. 이 대표는 당시 평균월급 5만원의 4배인 21만원을 받았다.못먹고 못살아 억척같이 일해지난 1978년 이모부와 ‘갈산조구’를 창업해 공동대표를 맡아 낚싯대 제조를 진두지휘했다. 7년 뒤인 1985년 10월 영규산업을 창립, 지금까지 100% 국내 생산만을 고집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혼이 담긴 낚싯대 생산’이라는 장인정신으로 오직 한길만을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그는 “어린시절 못먹고 못살아서 돈을 벌기 위해 억척같이 일했다”면서 “그때 고생은 말로 다 못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회사 설립 후에도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아내와 함께 공장에서 쪽잠을 자며 일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회사설립 초기에 함께 고생한 아내와 직원들을 잊을 수 없다”며 “30년이 지난 지금도 늘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다.그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낚싯대가 우리나라 수출 5위 품목 안에 들었다”며 수출 역군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그때는 생산도 끝나기 전에 오더가 들어왔으니 정말 정신없었다”며 “돈도 무지 벌었다”고 했다. “고집이 있지” 국내생산 고수이 대표는 “향우회나 지인들에게 돈을 쓰기도 많이 썼지만 부도도 수 없이 맞았고 친구들한테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도 수십억”이라고 한다. 그는 “이 돈만 제대로 모았어도 함양 부자는 됐을 거라”며 함박웃음을 웃는다. 영규산업은 현재 25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지만 한때는 정규 직원이 130명에 달했다고 한다.이 대표는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른 기업들처럼 공장을 중국이나 동남아로 이전하는 문제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내가 고집이 있지”라며 100% 국내 생산을 고수하며 수입제품과 차별화된 최고 품질의 낚싯대를 생산하고 있다. 영규산업은 이 대표의 우수한 기술력을 인정받아 창립 이듬해부터 유럽과 미국, 남미, 동남아 등에 낚싯대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5년 3월에는 이 대표의 ‘강공’이라는 호를 따 KKFT라는 브랜드로 내수용 낚싯대 생산 판에 들어갔다. 2009년부터는 품질뿐만 아니라 가격 면에서도 우수한 YGF라는 자사상표로 국내·외 시장에서 조사(釣師·낚시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영규산업은 30년 이상의 수출용 낚싯대 제작 경험을 토대로 다양성과 우수성을 가진 카본 낚싯대를 속속 개발하고 있다. 영규산업은 이 대표의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민물·바다원투 낚싯대, 갯바위·바다양어장 릴 낚싯대, 갯바위·원투 낚싯대, 지깅 낚싯대, 선상 낚싯대, 바다루어 낚싯대, 가물치 낚싯대, 중층 낚싯대, 중층 받침대, 뜰채, 민물·대물 낚싯대, 민물 낚싯대, 민장대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내수용으로 150여 가지를 생산하고 있고 수출용은 더욱 가지 수가 많아 수천가지에 달한다. 영규산업은 전국에 소매점을 운영해 소비자들이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민물 낚싯대 중에서도 제휘, 대작, 조신, 고죽, 지란지교 명작, 맥스필, 필링 스페샬 등 10가지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꼽힌다. 영규산업은 이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어텐더·마이티·크라토스 넥스트 알파 시리즈 등 신제품을 해마다 출시해 조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이 대표는 몇 해 전부터 꾸준히 국내·외 박람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낚시 애호가들에게 우수한 질의 낚싯대를 홍보하고 자사 제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대표는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것과 전제품 국내 제조·생산 및 확실한 A/S’를 경영 철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향우회도 동창회도 장기집권?이수영 대표는 어려서부터 타향살이를 한 탓에 고향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그는 한번 직을 맡으면 장기집권(?)이다. 자리욕심 때문이 아니라 맡은 일에 열성을 다하기에 주위에서 계속 떠맡기기 때문이란다. 40대 중반부터 재경 병곡면향우회 총무를 맡아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총무만 무려 6년을 했다. 그 후 부회장 4년을 지냈다. 2012년부터 2년 동안 제8대 재경 병곡면향우회장과 산악회장을 지냈다. 재경 함양군향우회 부회장도 2007년부터 지금까지 11년째 붙박이다. 재경 병곡초등학교 동창회장도 두 번에 걸쳐 모두 9년을 지냈다. 이 대표는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안했으면 안했지 이왕 할 거면 확실히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이 대표는 알게 모르게 향우회나 고향을 위해 사비를 아낌없이 지원해온 향우로 꼽힌다. 1년에 10여차례 고향을 방문한다는 이 대표는 고향마을 경로행사 등에도 20년 가까이 참여하고 있다.이 대표는 병곡면향우회 총무를 하면서 읍·면 총무 모임인 함총회를 결성해 각 읍·면 향우회는 물론 재경 함양군향우회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고향 일이라면 먼저 발벗고 나서는 이수영 대표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IMF 직전인 1996년부터 2년 동안은 이 대표에게 악몽 같은 해였다고 한다. 공장에 불이 났다. 모든 완제품과 반제품은 물론 재료까지 잿더미로 변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고향으로 오는 길에 전북 임실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1997년 IMF 때는 자고나면 부도어음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의 기술력과 신뢰로 이런 위기들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기술력과 신뢰로 위기 극복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던 낚시업계는 레저문화가 활성화하면서 최근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는 “지난해부터 낚시인구가 등산인구를 추월했다”며 “국내 낚시인구가 7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반색했다.“몇 해 전부터 회사도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이영수 대표는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제 많이 내려놓았다”며 만면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시리즈 끝>.최경인 대표이사·정세윤 기자·최원석 서울지사장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