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살이 우리는 함양인입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컴프레서 제조판매 외길…알짜기업 일궈 40대 초반부터 일찍이 향우회와 인연을 맺어 고향을 위한 일이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국계 회사의 컴프레서(압축기)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제조회사를 차려 경영한지도 26년이 됐다.도상원 유창공압(주) 대표이사를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 내에 위치한 그의 회사 사무실에서 만났다.“믿음만큼 큰 재산은 없다”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미소천사’다. 긍정 마인드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의 속은 매우 단단하다. 외유내강형의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신뢰와 성실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 “지나가는 약속이라도 꼭 지키라”고 강조한다. 도 대표는 “신뢰, 믿음만큼 큰 자산은 없다”고 강조한다.도상원(60) 대표는 1958년 9월 함양군 서하면 운곡마을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하초등학교(제37회)와 서상중학교(제20회), 안의고등학교(제27회)를 졸업했다. 함양군내 3개면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문어발식 학적이라 3개면 또래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고향 친구들도 많다.도 대표는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향우회에 참여했다. 친구의 형님인 염춘웅 선배가 향우회 회장을 맡고 있어 친구와 함께 향우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됐다. 도 대표는 그때부터 향우회와 산악회 등의 총무, 사무국장 등 여러 직책을 맡아 오랫동안 잔심부름도 하고 궂은일도 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향우회에 나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고 한다.도 대표는 2009년 5월 2011년 5월까지 2년동안 재경 서하면 향우회 회장을 지냈다. 2014년 11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는 재경 함양군 향우회 청년위원장 겸 골프동우회장을 맡아 향우회 발전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재경 서상중학교 동문회장 때에는 모교 발전은 물론 동문들과 향우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돈독하게 하기도 했다.향우회 산악회 등 궂은일 도맡아20여년전 고향마을 경로당 건립기금 300만원을 선뜻 쾌척했고, 수시로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 등에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지나가는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킨다”는 도 대표는 신뢰와 성실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의 성실함은 하숙집 주인의 눈에 들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성실한지 알만하다. 당시 직장도 학벌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하숙집 주인은 도 대표를 사윗감으로 낙점했다고 한다. 도 대표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1987년 하숙집 주인 딸과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이 있다. 맏사위가 가업을 잇기 위해 국내 굴지의 그룹 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정리하고 올 봄부터 도 대표를 돕고 있다. 도상원 대표는 군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첫 직장은 부산의 한 신문사 판매사원으로 입사해 2년을 근무했다. 그 후 창원 한국중공업에서 1년동안 사무직으로 일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 후 상경했다.영업사원으로 압축기와 인연그는 1989년 스웨덴에 본사가 있는 아트라스 콥코 영업사원으로 입사하면서 압축기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성실함이 빛을 발휘했다. 신입사원이었던 그는 첫해부터 판매왕에 올랐다. 당시 도 대표가 1년동안 판매한 콤푸레사는 50여대였다고 한다. 3년 연속 판매왕을 차지했을 만큼 성실하기도 했지만 영업에 소질도 탁월했던 모양이다. 판매했던 압축기는 산업용이라 한 대당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다양했다. 영업사원을 하면서 압축기가 경쟁력이 있는 사업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압축기를 직접 생산해 팔기로 마음먹었다. 1992년 봄 서울 금천구 구로공단에 작은 공장을 임대해 회사를 차렸다. 회사라고는 하지만 직원 2명뿐인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시작했다. 기계를 잘 다룰 줄 몰랐던 도 대표지만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생산현장에서 일했다. 영업은 당연히 도 대표의 몫이었다. 주문이 밀릴 때는 날밤을 새우는 일도 예사였다고 한다.그러나 시련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 왔다. 사업을 시작한 첫해 판매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부도를 맞았다, 무려 9000만원이었다. 당시 도 대표의 전 재산은 빌라 전세보증금 2000만원이 전부였다. 전 재산의 4배가 넘는 돈이 부도가 난데다 사업경험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8개월여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다잡고 초심으로 돌아갔다. 도 대표의 도전은 다시 시작됐다. 땀의 대가는 배신하지 않았다, 점차 사업도 안정을 찾아갔다. 연매출 2억원이던 회사를 창업 10년만에 100억원으로 성장시켰다. 신용등급도 1등급인 A+++ 알짜 강소기업이다.사업 첫해 거액부도 ‘와신상담’도 대표는 사업 첫해 부도가 났던 어음을 지금도 사무실 책상 서랍에 보관하고 있다.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사업이 힘들 때나 마음이 느슨해지면 이 어음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며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는 어음 뭉치를 꺼내 보여주었다. 도 대표는 “지금도 이 부도어음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고 한다. 도상원 대표는 이후에도 오직 압축기 생산판매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산 압축기 판매대행 외에는 한눈팔지 않는다.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는 도 대표는 “돈이 된다고 해서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것 보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내실 있게 운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욕심 내지 않고 이 분야만을 고수 하고 있다.도 대표는 “압축기는 공기를 압축해 사용한 뒤 자연으로 그대로 돌려보내는 무공해 청정에너지”라면서 4차 산업에 꼭 필요한 핵심적 제품을 생산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유창공압에서 생산하는 압축기는 산업용으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력 제품은 스크류 압축기라고 한다. 5마력부터 2000마력까지 종류도 다양하다.웬만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도 대표지만 이 업종이 경쟁도 치열하고 창업하기도 쉬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업종이라고 했다.영업사원이던 시절과 사업 초창기에는 영업사원을 따로 두지 않고 도 대표가 직접 영업을 했기 때문에 업무상 술을 먹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는 술 문화 자체가 ‘묵고 죽자는 식’이었다”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고 했다. 당연히 귀가시간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지어준 별명이 있다고 한다. ‘도 조간’이란다. 새벽에 조간신문과 같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며 크게 웃었다. 그는 “술에 취해 새벽에 귀가하는 자신을 아내가 ‘도 조간님 오셨어요’라고 놀리곤 했다”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아내가 지어준 별명 ‘도 조간’도 대표는 4년전 건강에 적신호가 오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심근경색 초기단계로 동맥에 스텐트 삽입 시술을 받았다. 그 후 직원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건강관리에 대해 강조한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고 운동하더라도 스트레스를 관리하지 못하면 허사다. 가장 좋은 명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고 했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도 대표도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힘들 때는 오히려 허허 웃고 넘긴다”며 많이 웃을 것을 주문한다.도상원 대표는 “지리산 함양이라고 하면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좋고, 멋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사람들에게 각인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함양이 살기 좋아 누구나 귀농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길 바란다”는 말에서도 그의 고향 사랑을 느낄 수 있다.최경인 대표이사·정세윤 기자·최원석 서울지사장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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