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살이 우리는 함양인입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고향은 무엇보다 중요한 나의 뿌리다” 미수(米壽). 곧 여든여덟이다. 성공한 사업가로 남부럽지 않게 재산도 모았다. 자신이 운영했던 무역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선으로 한발 물러 선지도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나 고향이나 향우에 대한 애정만큼은 식을 줄 모른다. 지금도 고향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발 벗고 나선다.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게 없는 박성필 ㈜옥산무역 대표이사의 고향사랑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박 회장을 서상면 옥산 고향마을 자택에서 만났다.고향사랑은 늘 현재 진행형박 회장은 재경 함양군향우회장 뿐만 아니라 서상면향우회장, 안의중학교 총동창회장 등을 지낸 재경 향우회 원로이다. 고향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사양함이 없다. 돈을 많이 벌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도 아니다. 국내 굴지의 무역회사인 옥산무역과 심진무역을 창업해 경영한 CEO로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창때는 24시간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런 중에도 향우회나 동문회 등 고향일이라면 무조건 달려간다.“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좋다.”“고향은 가슴을 뛰게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는 박 회장의 고향사랑은 조건 없는 무한사랑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박 회장은 70세가 되던 2000년 7월 이곳 옥산마을에 아담한 집을 짓고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지금도 회사일은 아들이 거의 맡아 하지만 2년 뒤 90세가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에 정착할 생각이라고 한다. 박 회장은 타향살이를 시작했던 젊은 시절부터 나이 들면 고향으로 돌아와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천석꾼 집안 막내로 태어나박 회장은 천석꾼 집안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때도 500석을 수확했을 정도였으니 대대로 이어온 대지주 집안이다. 넉넉한 살림살이 덕에 배곯고 살지는 않았단다.박 회장은 서상초등학교(제18회)와 안의중학교(제1회)를 졸업한 뒤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정치에 꿈이 많았던 박 회장은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뒤 2학년 때 영문과로 전과했다. 중·고등학교 때 축구를 했던 박 회장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학교대표로 선수생활을 했다. 중앙미드필더를 맡았을 만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오랜기간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어서인지 지금도 미수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다.박 회장은 “무엇보다 ‘뿌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밑도 끝도 없는 그의 고향사랑은 향우들에게 늘 귀감이 된다.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박 회장은 모교가 아닌 서상고등학교에도 수년째 거액의 장학금을 지급한다. 대학에 진학하는 졸업생 3명에게 등록금을 지원하고 있다. 모교인 서상초등학교와 안의중학교는 말할 것도 없다.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시설개선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박 회장은 학창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한 데다 각종 모임에 참여하는 등 성격도 활달해 인맥도 마당발이다. “개인적인 일로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없지만 고향일로 가끔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는 박 회장.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사는 게 세상사는 이치가 아니겠냐”며 참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되뇌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되로 벌어 말로 먹고살게 해줘 방자징의 전수자를 배출한 함양징터에서 영각사, 논개묘 등으로 이어지는 관광밸트 조성, 몇 년전부터 조성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벚꽃단지 꽃축제 개최 등 고향발전을 위한 관심과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박 회장은 단순히 관심에 그치지 않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솔선한다. “관광객들이 4시간이상 머물 수 있어야 지역에 도움이 된다”며 유무형의 관광자원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개발해 고향이 더 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으면 한다. “돈 잘 내놓는 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는 박 회장은 향우회나 동문회 등 고향을 위해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한다. “물려받은 재산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번 돈 고향 위해 쓴다고 뭐라 할 사람 없다”며 “고향이라는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재경 향우회관 이전기금 모금이나 향우회 행사 찬조금 등도 매번 빠짐없이 챙긴다. 그는 “되로 벌어 말로 먹고살게 해 주는 것이 고향”이라고 한다. 박 회장의 고향집 대문 안쪽 벽돌기둥 한쪽을 차지한 지름 30㎝가량 되는 동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재경함양군향우회와 재경산악회 후배들이 박 회장의 입택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해 붙여 놓은 것이다. 그가 후배들에게 얼마나 존경 받는 원로 향우인지 웅변해 주는 듯하다.고려대를 졸업한 박 회장은 조달청 국가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맡은 업무는 무역파트였다. 외국에서 조달물품을 구매해 들여오는 일이었다. 조달청 직원으로 코오롱그룹과 업무상 인연을 맺어오다 1976년 그룹계열사 사장으로 발탁돼 5년을 근무했다. 이듬해 옥산무역을 창업해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그 후 심진무역을 창업해 두 개의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회사 이름까지도 고향마을과 모교인 안의중학교 재단 이름에서 따왔다. 곳곳에 고향을 생각하는 박 회장의 마음이 묻어난다.조부와 부친도 베푸는 삶 실천박성필 회장의 조부와 부친도 늘 베푸는 삶을 살아온 모양이다.“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게 그건데 천성이 어디 가겠나”라며 박 회장은 선친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옥산마을 초입에는 송덕비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박 회장의 할아버지 송덕비고, 다른 하나는 부친에 대한 송덕비다.육십령길이 뚫리기 전까지 박 회장의 고향 옥산마을은 전북 장수와 무주로 가는 길목이었다. “저기 보이는 뒷산이 깃대봉인데 당시에는 저 산에 도적떼와 호랑이 같은 맹수도 많았다. 60명 이상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고 해서 60령이라고 불렀을 만큼 험준했다”며 오후 3시 이후에는 아예 산을 넘어갈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다. 때문에 박 회장집 사랑채에는 산을 넘기 위해 먹고 자는 길손들로 항상 넘쳐났다고 한다. “먼 길 오느라 피로에 지친 사랑채 손님들을 위해 부친께서는 나한테 가끔 노래를 시켰지, 그때 손님들이 준 용돈을 모아 논 두마지기를 샀을 정도로 많은 가객들이 사랑채에서 먹고 자고 갔다”고 했다. 길손들이 그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마을 입구에 송덕비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60령을 넘는 길이 생기기 전까지 2대에 걸쳐 60년을 뒷바라지했다. 할아버지의 송덕비는 단기 4288년(서기 1927년) 8월에, 아버지의 송덕비는 그 후 임신년 8월에 각각 세워졌다. 전면에는 박재홍(박성필 회장의 조부) 박동문(부친)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라고 새기고, 옆면에는 건립일과 함께 행여객인(行旅客人)이라 새겨 길손들에게 베풀어 준 은덕을 칭송했다. 박 회장의 부친은 4년제였던 서상초등학교에 거액의 사재를 들여 학교시설을 증축하고 보완해 6년제 학교로 승격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박성필 회장의 고향집 뜰에 사과나무와 배나무 등 유실수 8그루와 소나무 등 조경수 몇 그루가 있다. 대문 입구에 있는 금송 두 그루는 몇년 더 키워 모교인 서상초등학교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미 한그루는 기증했는데 교장 선생님이 한그루 더 기증해 달라고 부탁해 두 그루 다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박 회장의 집은 경상남도가 선정한 ‘아름다운 농촌주택’으로 뽑히기도 했다. 대지 200평에 건평 30평짜리 소담한 주택이다. 화려하게 잘 지어서가 아니라 기존 마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것이 아름다운 주택으로 선정된 이유란다. 졸수(卒壽)를 바라보는 박성철 회장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듯하다. 박 회장은 몇몇 향우들과 의기투합해 한때 명맥이 끊겼던 재경함양향우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다. 이제 그는 재경향우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그의 식을 줄 모르는 고향사랑과 열정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최경인 대표이사·정세윤 기자·최원석 서울지사장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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