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서울살이, 우리는 함양사람입니다⑥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탁주 배달부에서 수천억대 재력가로 자수성가 탁주 배달부로 시작해 수천억대 재력가로 인생역전의 삶을 살고 있는 재경 향우가 있다. 스스로 백전촌놈이라고 말하는 정오봉 정오개발(주)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좋은 사람들을 만나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정오봉 회장. “촌놈이 못할게 뭐 있겠나. 열심히하다보니 주위에서 도와줘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정 회장을 서울 중구 무교로 정오빌딩 6층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 한복판 사거리 코너에 위치한 이 빌딩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 회장의 건물 중 하나다. 7층짜리로 주위 빌딩숲에 비하면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몸값은 수백억원이라고 한다.14살 때부터 타향살이 시작이런 정 회장도 처음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고생으로 말하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정 회장은 백전면 평촌마을에서 2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양중학교에 진학해 함양중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해 서울 유학길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결혼한 큰누나가 서울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타향살이를 시작한 정 회장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탁주 하치장에 취직했다. 요즘으로 치면 막걸리 중간도매상에서 배달 일을 시작한 것이다. 스무살 젊은 나이긴 하지만 무거운 탁주를 종일 배달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정 회장이 담당 했던 구역은 무교동 광화문 지역이었다. “당시 광화문 일대는 낙지집이 많았는데 음식점에 직접 막걸리를 넣으면 돈을 벌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납품할 수 있는 거래처를 뚫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하치장 회원이 아니어서 납품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 회장은 포기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음식점 두 곳에 탁주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비회원이 음식점에 술을 공급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한다.학사주점·갈비집 연이은 대박정 회장이 생각 했던 것처럼 주류 공급업은 돈벌이가 됐다. 제법 돈을 벌어 한국일보 근처에 학사주점을 차렸다. 80년대 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학사주점의 원조격이다. 당시 나이는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주점업으로 억대부자가 된 정 회장은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요식업으로 눈을 돌렸다. 북창동에 삼계탕집을 차렸다. 대박이 났다. 근처에 ‘제일주물럭’이라는 갈비집을 냈다. 연기를 배출하는 후드를 테이블 밑으로 설치했다. 정 회장은 “이런 연기배출 구조도 아마 우리나라 최초였을 거”라고 했다. 연기 없는 쾌적한 환경에다 고기 맛도 좋으니 손님들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일했다.당시 정 회장의 주위에는 ‘집장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건축업에 뛰어 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절이어서 건축경기가 한창일 때다. 제일주택을 창업해 20채 남짓한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했다. 2년여 동안 120채를 시공해 분양했다. 건설경기가 활황세를 이어가자 건설업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정 회장은 다시 업종 전환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임대사업에 눈을 떴다. 1991년 7월 문정동에 제일빌딩을 지어 분양하지 않고 임대했다. 2년뒤 현재 정오개발(주) 본사가 있는 무교동 사옥을 인수하고 정오관광개발 주식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임대사업을 시작했다. 정 회장은 3년전 경매로 나온 stx부산사옥(팬오션빌딩)을 인수하는 등 서울에 4개, 부산과 부천지역 각각 1개 등 전국 요지에 빌딩 5개와 호텔 1개를 소유하고 있다. 정 회장은 “절대 무리하게 투자하지 않는 것이 사업성공 비결”이라고 했다.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런 그도 늘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수십억을 사기당하기도 했고 피해를 입고도 오히려 가해자로 몰려 법정다툼까지 벌이는 어려움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규제에 묶여 재산권 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몇 차례나 된다. 정 회장은 “업종을 전환하거나 위기 때마다 주위 분들이 도와줘 잘 극복할 수 있었다”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말한다.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교만하지 말자는 것이 생활신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수천억대 재력과는 달리 그의 사무실은 채 20평이 되지 않는다. 접견용 소파와 책상이 전부다.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정 회장은 자신을 위한 생활은 엄격하고 검소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업가다. 어린이재단인 초록우산 강북지역 회장을 맡아 수년동안 꿈나무들을 위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순천향대에 억대 학교 발전기금을 희사하기도 했다.제10대 재경 백전면향우회장을 지낸 정오봉 회장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도 깊다. 재경 향우들의 오랜 숙원이던 향우회관 이전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낡고 오래된 재경 향우회관과 원로 향우들의 모임장소인 경로회관 이전문제는 그동안 재경향우들의 큰 숙제였다. 정 회장은 지난 2011년 백남근 동양고속 대표가 재경향우회장으로 있을 당시 의기투합해 월세도 없이 보증금만 받고 자신의 빌딩 한편을 향우회관과 경로회관으로 내 주었다. 함양제일고 장학금 지원, 경로잔치, 농어촌교회지원사업 등 수차례 고향발전을 위한 일을 해왔지만 베푼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며 멋쩍어한다.나이 들어 더 자주 찾는 고향정 회장은 “비록 배곯고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고향은 어린시절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며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을지 늘 생각한다”고 했다.정오개발 관리이사로 정 회장을 곁에서 돕고 있는 작은아들 원준(37) 씨는 “아버지가 나이 드시니 고향생각을 더 많이 하시는 것 같다”며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고향을 더 자주 가신다”고 얘기했다. “부산 빌딩을 매입한 뒤 부산에 가실일이 자주 있는데 비행기나 KTX를 타고 바로가면 편한데도 꼭 차를 이용해 고향에 들렀다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정 회장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애틋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6남매를 키우기 위해 안해 본 장사가 없다”며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살아생전 소원이 고향에 논밭을 많이 사는 것이었다”며 정 회장은 30마지기의 논과 밭을 사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렸다고 했다. 수년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논밭은 팔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정 회장은 가끔 고향에 들러 논밭을 둘러보며 어머니 생각에 잠기곤 한다.최경인 대표이사·정세윤 기자·최원석 서울지사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정오봉 회장이 걸어온 길◇ 출생지 : 백전면 평촌마을◇ 학 력 백전초등학교 졸업(제41회) 서울 협성고등공민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수료 순천향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2015. 8)◇ 주요 경력 현대교회 수석장로(1992. 5~현재) 중앙대학교 총동문회 부회장(1992. 9~현재) 정오개발주식회사 회장(1993. 4~현재) 정광피엔아이주식회사 회장(2006. 2~현재) 정광개발주식회사 회장(2012. 3~현재) 국제로타리 총재 특별대표(2015. 1~현재) 캄보디아 프놈펜 꽁노이교회 설립(2014. 9) (사)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회 부회장(2015. 1~현재)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이사(2016. 2~현재) 케냐 나이로비아교회 설립(2016. 6) 재경 백전면향우회장(2010. 11~2012. 11/제10대)◇ 주요 상훈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2011. 12) 국세청 모범납세자 표창(2013. 8) 서울시장 표창(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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