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군민들에게 상림공원이란 휴식처이며 고향의 향수를 전하는 곳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그의 업적이며 유산이기도 하다. 시대를 잘 못 만난 비운의 천재로 묘사되는 최치원 선생이 천년이 지난 현재 한중 양국을 잇는 문화 아이콘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정치이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최치원 선생의 유물과 행적이 남아있는 지자체들이 앞 다퉈 ‘최치원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이 300여 곳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될 정도로 수많은 지자체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쫓으며 각 지자체들의 최치원 마케팅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글 싣는 순서>1. 최치원 그의 삶과 길2. 최치원 도시연합의 중심 경주시3.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곳 – 문경시·의성군4.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곳 - 군산시·정읍시5.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곳 - 합천군·해운대구6. 함양 상림공원과 최치원 역사공원고운 최치원(崔致遠·857~?)은 신라시대의 학자로서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며, 신라 문성왕 19년(857년) 경주 사량부에서 최견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6두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자질을 인정받아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로 봉해졌고, 학문과 문학에서 깊은 업적을 남겨 한국 한문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고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글로벌 유학파이자, 문장가이며 목민관이자 사회개혁자 등 다양하게 불린다. 그 만큼 다양한 방면에서 천재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중국 유학에서부터 신라로 돌아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고, 각 지역 태수를 역임하며 지역에 깊은 흔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6두품이라는 신라사회의 높은 벽에 막혀 좌절도 했으며, 그의 사상은 신라사회에 녹아들기에는 너무나도 앞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고국으로 돌아온 다음해 정월 당나라 체류 중에 지은 글들을 모아 ‘계원필경집’ ‘중산보궤집’ ‘시부’ 등을 편찬했다. 계원필경 20권은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인 동시에 한문학을 열어준 구슬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 선생의 인생 여정868년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은 더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당 유학길에 오르던 12세 아들 최치원에게 “10년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경주최씨 가문의 자부심과 6두품의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최치원은 유학 6년 만인 18세(874년) 때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급제한 후 약관 20세(876년)에 첫 관직(율수현위)에 오를 만큼 학문이 출중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가리켜 “짧은 두레박줄은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고 무딘 창은 굳은 것을 뚫을 수 없습니다”라며 겸손했지만, 재능은 난세에 빛을 발했다.‘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수도 장안까지 점령한 881년. 토벌군 사령관인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복무하던 최치원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당나라 전역에 알리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최치원은 884년(헌강왕8) 28세 청년이 되어 16년 만에 귀국했다. 당 황제가 ‘자금어대(紫金魚袋, 정5품 이상에게만 주는 붉은 주머니)’를 하사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신라 하대의 혼란은 진성여왕(887~897) 때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중앙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적어 있었다. 국가재정은 궁핍해지고, 지방에서 조세와 공부(貢賦)가 걷히지 않으며, 각지에서 도적이 봉기하여 마침내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각기 건국을 하고 세력을 굳혀가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최치원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894년(진성여왕 8) 2월 신라사회 개혁안인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렸다. 최치원은 결국 898년 42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에 은거하였고, 개혁을 거부했던 천년 왕국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국 각지의 최치원 유적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대표적 유적으로는 함양에 학사루와 상림숲이 있으며, 경주에 상서장, 독서당, 초월산대숭복사비, 해운대에는 해운정, 창원(마산 합포구)에 월영대, 고운대와 합천에 농산정, 홍류동, 군산에는 옥구향교, 자천대가 서산에는 부성사, 서광사, 문경에 지증대사적조탑비 등 전국적으로는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이 300여 곳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협의회는 그 동안 실무협의회를 통해 최치원 선생 유적 관련 문화콘텐츠 개발 협력 및 공동사업 추진을 위한 사항들을 논의해 왔다. 특히 최치원 선생의 행적을 쫓는 ‘고운 트레일’은 경주시(상서장·독서당·서악서원)→문경시(야유암·지증대사적조탑비)→서산시(부성사·서광사)→군산시(문창서원·자천대)→함양군(학사루·상림)→합천군(농산정·홍류동)→창원시(월영대·고운대·두곡영당)→해운대구(해운정·최치원 동상) 등 전국적인 유적답사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가고 있다.고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협의회고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는 전국에 산재된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유적을 토대로 상호교류를 통해 미래지향적인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최치원 선생에 대한 역사적 유적과 정신을 집대성해 문화융성 도시 상생발전을 위한 협의회이다. 지난해 7월 출범한 협의회는 함양군을 비롯해 합천군, 창원시, 경주시, 문경시, 서산시, 보령시, 군산시 등 8개 시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자체들의 ‘최치원 마케팅’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전국 지자체들이 ‘최치원 마케팅’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함양군에서는 98억원을 들여 문화예술회관 뒤편 1만8천521㎡에 최치원 선생 역사공원을 2017년 연말께 완공할 계획이다. 역사공원은 전통 한옥 구조의 사당(159㎡)과 각 152㎡ 규모의 사료관과 전시관, 고운루(48.6㎡) 등이 들어서며, 사당 앞에는 평소 선생의 모습을 재현한 입상이 세워진다. 창원시는 시내 곳곳에 분포한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문학의 신 최치원의 길’ 순례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하동군의 경우 최치원 선생이 즐겨 찾았던 쌍계사에서 불일폭로로 이어지는 1.5km 탐방로를 조성하는 `고운 유람길` 조성사업을 진행 중이다. 최치원 마케팅을 가장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곳은 경주시로 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최치원 역사 탐방’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경북 문경시는 최치원이 직접 쓴 국보 ‘사산비명’이 있는 봉암사의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 일대를 개발할 예정으로 150억~200억원을 투입될 것으로 보이며, 정읍시의 경우 그가 풍류를 즐겼던 피향정(보물 289호)의 연못을 복원할 계획이다.이처럼 최치원 선생의 유물 등 흔적이 남아 있는 지자체들이 앞 다퉈 마케팅에 열을 올리며 관광객, 특히 요우커들을 끌어들이기에 안간힘이다.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최치원 연표>857년(신라 문성왕 19년) : 경주 사량부 최견일의 아들로 출생. 출생지가 전북 군산 또는 경남 창원이라는 설도 있음868년(경문왕 9년) : 12세의 나이로 당 나라 서경으로 유학874년9월 : 유학 6년만에 당나라 빈공과(賓貢科) 장원 합격876년(헌강왕 2년) : 선주(宣州:지금의 중국 양주) 율수(溧水)의 현위(縣尉)의 벼슬을 받음877년 : 사직 후 굉사과(宏詞科)과 응시 위해 공부879년 :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됨.881년7월8일 : 황소의 난 당시 격황소서(檄黃巢書)지음.883년 :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 펴냄885년(헌강왕 11년) 3월 : 17년 만에 신라로 귀국886년 1월 : 당에서 지은 계원필경집 등을 헌강왕에게 바침887년3월 : 쌍계사 진감선사비 건립 890년(진성여왕 4년) : 성주사 낭혜화상비 찬술을 명 받음. 대산군(현 정읍시) 태수로 임명893년 : 부성군(현 서산) 태수 역임. 이후 하정사로 임명894년 2월 : 천령군(현 함양) 태수로 부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고 아찬에 배수됨.895년 7월 :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를 지음898년 1월 :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를 지음900년 12월 :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를 지음904년 봄 : 해인사 화엄원에 은거하여 피난과 요양908년(51세) :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지음. 최치원 선생의 마지막 행적909년 :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음.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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