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내리는 햇살이 따스했다. 뺨 위로 봄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 추위에 움츠렸던 어깨가 저절로 활짝 펴졌다. 두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켰다. 눈부신 햇살이 좋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느릿느릿 걷다보면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노란 꽃봉오리가 쏙, 쏙 올라온 수선화도 보였고 가지에 붙은 채 말라버린 석류도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특별한 무엇처럼 다가왔다. 한참을 걸었다. 어느 순간 좁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빛과 그림자가 선명했다. 마치 낡은 흑백의 사진처럼 아늑하고 고요해 보였다. 어쩌면 내 마음이 어린 날 뛰어 놀던 골목길을 불러낸 것은 아닐까. 나는 느릿느릿 오래된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 하나가 전부였다. 나란히 줄을 선 담장에는 검은 이끼가 자라있기도 했다. 담장 밑에는 간혹 작고 앙증맞은 노란빛의 민들레가, 보랏빛의 오랑캐꽃이 피어 있었다. 담장 안에는 감나무가 허공을 향해 굵은 가지를 펼쳐 놓았다. 벌써부터 감꽃향기가 바람에 따라 흩어지는 듯 했다. 활짝 열려진 대문 틈으로 작은 마당이 보였다. 마당에 새까맣게 손때 묻은 의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순간 마음에 묘한 그리움이 엉기었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세련되고 깨끗한 것을 동경하다가도 가끔은 허술하고 낡은 것에서 깊은 편안함을 느끼고는 한다. 낡은 의지를 담벼락에 놓고 앉아 따스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마음 맞는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며 봄볕을 같이 즐기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혀끝에 커피 맛이 느껴졌다. “올왈왈” 파적을 일으키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목청껏 짖었다. 길에서 생명 있는 무엇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더 큰소리를 내며 꼬리까지 흔들었다. 반갑다는 것인지 빨리 지나가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녀석의 목청에 떠밀려 느릿느릿 오래된 사진 속을 걸어 나왔다. 골목길을 벗어나자 자동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멍하게 서있는 나를 향해 “빵빵” 경적을 울렸다. 도로에는 자동차가 가득했다. 모두들 자동차를 타고 집을 나서고 돌아오면 자동차에서 내려 곧장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걷는 것을 잊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밀란 군데라의 「불멸」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길은 풍경에서 사라지기에 앞서 먼저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인간은 걷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지 않고, 걷는 데서 기쁨을 맛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문득 사람들은 걸음을 걷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쏟아 오를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봄바람의 정령이 혹은 가을바람의 정령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지금의 나처럼 걷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길은 결코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뚜벅뚜벅 길을 걷는다. 발걸음만큼 생각들이 머릿속에 채워졌다가 비워진다. 때로는 걱정스런 것들이, 때로는 즐거운 것들이 밀물처럼 안개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명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쑥날쑥 한다. 하지만 그것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고요만이 남는다. 어디선가 꽃소식 묻은 바람이라도 한줄기 불어오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별것 없다’는 것과 ‘별것 없어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길을 걷는다. 내일도 나는 길을 걸을 것이다. 오늘은 오래된 골목길을 만났다. 내일은 또 무엇을 만날까.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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