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호교회 김갑석 목사지난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찬송가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성도들과 함께 부르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작곡자 남궁억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게 되었다. 먼저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봄 돌아와 밭 갈 때니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곡식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누군가 대답을 할 까/ 일하려 가세 일하려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려 가세이 찬송은 교회 장로이며 교육자인 남궁억(1863-1939년)이 1922년에 작사한 찬송가로 애국가처럼 많이 불렸던 찬송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침략 하에서 수모를 겪을 때 이 찬송가 가사를 지었으며 이 가사에는 선생의 신앙관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서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이 불리어 지자 일본은 애국성이 농후하다고 하여 부르지 못하도록 금한 제1호 찬송가이다. 남궁억의 삶을 살펴보면 선각자의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호는 한서(翰西). 20세까지는 한문을 공부했고 1884년에 재동의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다. 1889년 고종의 어전통역. 1892년 경북 칠곡 부사(府使). 1895년 궁내부(宮內部) 토목국장을 역임했다.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참여했고. 중추원 의관(議官). 독립협회의 수석총무를 맡았다. 1898년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필화로 2번이나 구속되었다. 1905년 성주 목사(牧使). 1906년 양양 군수를 지낸 뒤 1907년 12월 오세창·유근(柳瑾)·장지연 등과 대한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4월부터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했고 광동학우회를 조직하여 〈교육월보〉도 발간했다. 일제강점 이후 배화여학교에서 9년간 영어를 가르치다가 1918년 강원도 홍천의 모곡으로 내려가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전념했다. 1933년 '반일 애국사상과 무궁화사건'. '십자가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듬해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학교는 폐쇄되었다”특별히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군수직에서 물러나 ‘배화학교’ 교사로 들어가 여성교육에 몸답고 역사교육과 진보적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며. 영어를 가르치다가도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으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 꽃으로 삼천리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를 수본으로 만들어 수를 놓게 했으며 태국기도 그렇게 수놓게 하였다. 1918년에 선생은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가서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그의 무궁화 사랑은 지극하여 학교 실습지에 학생들과 같이 무궁화 묘목 밭을 만들고 가꾸면서. 학교 운영비를 마련한다는 구실로. 해마다 수십만 주의 묘목을 전국 기독학교와 교회. 기독교 단체. 가정 등에 분배하여 학생들의 가슴에 우리 민족의 강함과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받게 되었고 그 후 병으로 보석된 후1939년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학생들에게 유언했다. “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이나 무궁화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1931년 홍천에서 300리 눈길을 걸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남긴 “내가 널리 재를 넘어 학교까지 눈길을 오는 동안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왔고 없을 때는 내 스스로 길을 뚫어 여기 가지 왔듯이 여러분처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교육을 받지 못한 농촌의 농민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길이 되어야 한다” 말은 감동을 준다. 6월을 지나 7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변에 무궁화 꽃이 언뜻 언뜻 보인다. 나라 사랑. 무궁화 사랑. 민족사랑을 일평생 가슴에 담았던 그 분의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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