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도의원 문정섭1950년 6·25가 일어났던 4년 뒤 필자가 살던 읍내 죽림리 내곡마을 뒷산에 군내 최초로 산판이 들어왔다. 읍내 시장통입구 (구)버스 정류소 옆 동균상회라는 일반잡화 도매상을 운영하시고 웅곡과 죽곡 죽림리 군유임야에 현재 입상이 좋은 낙엽송을 식재하시고 후에 조림을 많이 한 공로로 5·16민족상까지 수상하셨던 고 김윤근씨가 읍내서 제일 가깝고 임상이 좋았던 마을 뒷산에 산판을 시작한 것이다.산 속에 위치한 산판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옮기면서 소나무를 베어 송판(판자)을 제재하였고 완제품은 마을 주민들이 도로까지 운반하였다가 후에 트럭에 싣고 가 부산의 좌천동 달동네 판자촌 등을 신축하는데 이용했다.산판에서는 4명이 1개조 팀을 이뤄 송판을 켜고 있었다. 기계를 담당하는 엔지니어와 원목을 톱에 얹어서 밀어주는 하다구시와. 반대편에서 나무를 당겨주는 히파리. 그리고 나무의 껍질(피죽)을 받아내는 데모도가 한 팀을 이루고 일을 했다. 물론 원목을 베어 모으는 잡부들은 별도였다.마을 사람들은 일찍부터 송판을 받아 지게로 져 나르기 위해 줄을 서야했고. 순서에 의해 송판을 받아 운반하고 대가를 받았다. 6자에 4치 송판은 15쪽이 5치는 12장. 6치는 10장이 한 평이다. 생나무는 무거워 양지바른 곳에 받아 말리기 위해 늘어놓기도 하였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남들이 가져가는 수가 있어 송판에다 표시를 하기도 하였다.부녀자들은 머리에 이고 운반하였고 지게가 없고 어린 필자의 경우 새끼줄이나 칡으로 멜빵을 하여 운반하기도 하였고 한쪽은 묶고 한쪽은 어깨에 메고 끌기도 하였다. 이렇게 운반된 송판은 서기가 영수증을 가름하는 전표를 주었고 훗날 전표를 가져가면 현금을 지급해 주곤 했다. 이날은 수당을 받는 날(간조)이라 기분이 좋아 어른들은 한잔을 하곤 했다.송판을 차에 싣는 전문 상차꾼들은 별도로 따라 다녔다. 당시에 차량이 부산까지 가려면 도중에 30여곳의 파출소를 지나야 하는데 전주(사장)는 미리 봉투를 만들어 연료비나 간식비 명목으로 통행료를 지급하고 지나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불법으로 나무를 싣고 다녔던 달구지에도 적용이 되었고 이 또한 대낮이 아닌 어둡기 시작하는 초저녁 무렵에 이뤄졌다.그 후 마을 뒷산에 나무가 없어지자 산판은 읍내 곰실 웅곡방향으로 산을 넘어가 가재골로 운반을 하였다. 1959년경에는 돈 되는 송판장사가 많아지더니 마천면 강청리와 삼정리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당시 남선목재사장 장영섭씨가 백무동이나 영원사 위까지 산길을 개설하고 도벌을 하다가 지리산 도벌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가는 바람에 지금도 베어놓은 원목이 영원사 입구 등산로 변에 수북히 쌓여있어 당시 사건을 증언해 주고 있다.이 때 산에서 원목을 베다 팔기도 하였는데 6자 4치는 8사이였고. 5치는 12사이. 6치는 18사이. 7치는 24사이로 계산을 하였다. 불법으로 채취한 원목은 주로 밤으로 운반하였는데 나무의 치수를 넓히기 위하여 망치나 돌로 말구(나무 윗 부분)를 찧어 넓힌 후 찰흙을 바르기도 하였다.어린 시절 필자는 지게를 갖고 싶어 부모님께 사주도록 졸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지게질에 익숙치않아 어른들의 지게를 빌려 나무를 지고 다니면 잘 걸려 넘어지고 또 바위 위 같은데 쉬다가 뒤로 넘어져 빌린 지게 가지를 부러뜨리곤 했다.휴천면 금반에서는 철선을 매달아(케이불카) 원목을 운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군내의 소나무는 당시에 다 없어졌다. 늦게까지 좋은 임상을 유지했던 죽림리 시목마을 뒷산 친구 K씨의 넓은 산 소나무는 그 뒤에 없어졌다.옛날의 소나무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은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와 영원사 뒤에 몇 그루가 남아있어 안타깝기만 하고 당시 우리 군 산림임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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