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산청함양 추모공원 위령탑>아픔의 역사. 함양 양민 학살 사건을 말한다.1.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참혹함2.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의 역사3. 진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4.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우리가 할 일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겨 62년이 흘렀다. 당시 전쟁으로 수백만의 목숨이 산화하는 등 우리 민족 최대의 아픔으로 기억된다.그러나 이 중에는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 속에 숨 쉬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총부리에 난자당한 이들이 있다. 깊은 산골 속에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농부였던 이들. 경찰의 호출에 아무 죄가 없다며 불려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같이 숨진 이들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고 일컫는다.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고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 정부의 사죄가 있었지만 한(恨) 많은 가슴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 권력은 한 생명을 앗아간 것에 그치지 않고 숨진 이의 자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근까지도 어둠속으로 몸을 웅크리게 했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로 치부하면서. 함양을 중심으로 산청·함양 사건과 거창 사건은 큰 주목을 받으며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각종 기념 사업들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이들 사건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도중인 1951년 발생했지만 함양의 경우 전쟁 발발 전. 1949년도부터 자행돼 왔다. 군경에 의해 자행된. 국가 권력의 폭력에 의한 잔혹한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함양땅에서.함양지역에서의 한국전쟁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부터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붙잡힐 때까지 15년간 계속되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전쟁을 치른 지역인 것이다.▲ 산청함양 추모공원 내 희생된 386명의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각’3. 진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6.25 한국전쟁이 끝난지 60년. 그 전쟁 속에서 숨진 이들만 수백만으로 우리민족의 최대의 아픔으로 기억된다. 전쟁은 군인들만이 숨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우리 민족의 아픔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십에서 백여만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양민학살이나 민간인학살로 불리며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살아남은 유족들은 국가와 싸우고 있다.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진상규명을 통해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그에 따른 보상 등의 절차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유족은 말했다. "정부에서 잘못을 인정했으면 10원이던 100원이던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할 것 아니냐"고. 진실화해위가 활동한 5년동안 알면서도 묻어 두었던 수많은 사실들이 드러날 수 있었으며 억울하게 숨진 이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었다. 단순 권고 사항에 거쳤지만 국가의 명예회복에 대한 노력과 지원.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 법령 및 제도 등의 시정 등 다양한 사항에 대한 절차가 이뤄질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국가 사업이 진행됐으며 유족회별 활동을 통해 기념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산청함양 사건으로 숨진 이들의 영탑이 모셔져 있다.▲ 산청함양 추모공원 모습△드러난 민간인 학살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최초의 폭로는 '거창 양민학살'이다.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인 신중목 의원이 제54차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양민학살사건을 폭로하면서 온 국민을 경악케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전국에 걸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소문만 무성했을 뿐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는 못했다. 거창사건의 경우도 정부의 철저한 은폐와 통제에 의해 사건 자체가 축소되고 묻힐 수 밖에 없었다.이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1990년을 전후해 각지의 유족회에서 집단 학살과 관련한 문제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제주도 4.3항쟁과 광주 5.18 등 굵직한 사건들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다. 때를 같이해 전국의 학살사건과 관련해 곳곳에서 참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산청함양 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복예관'△진화위의 활동한국전쟁 전후 집단 희생된 민간인 피해자는 있으나 정작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되는 피해자 유족들의 요구로 인해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시행되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진화위는 한국전쟁 전후 불법적으로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를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발굴하고 전반적인 기초조사사업을 지자체별로 실시해 진실규명에 필요한 단서를 찾아내고 화해 사업의 토대를 마련했다.위원회는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으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 부역혐의 사건. 군경토벌사건. 여순사건. 미군 폭격 사건. 그리고 인민군 및 좌익 등에 의한 피해 사실의 진상을 규명했다. 위원회의 규명 내용은 주로 희생규모. 피해자 및 희생자 확인. 피해 및 희생경위. 가해주체. 지휘계통. 유족의 피해 등이다. ▲ 거창사건 희생지 중 하나인 탄량골 희생장소 보존비▲ 거창사건으로 숨진 719명의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각민간인 집단희생과 관련해 진화위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8.206건 중 6.742건을 진실규명하고. 454건은 진실규명 불능. 764건은 각하. 242건 취하. 4건에 대해서는 이송처리 했다.진화위는 정부에 대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구제를 위한 조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 보완. 법령.제도.정책. 관행의 시정 및 개폐 등을 권고했다. 또 과거 공권력의 위법·부당한 행사 사실에 대해 피해자와 유가족 등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으며 지역합동위령제를 지원함으로써 국민적 화해와 통합에 노력. 역사의식 함양을 위한 교육 및 홍보 등을 권고했다.진화위의 이 같은 권고 이외에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조사결과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중 많은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적법절차 없이 전국적으로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사실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 발생을 목격. 인지한 참고인뿐만 아니라 소수이긴 군?경 등 가해자 측 소속원들이 대부분 사건 발생 사실과 함께 재판 등 적법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이 살해되었음을 인정한 결과이다.이로써 사건이 발생한 후 60여 년 간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도 없고 사건 발생 자체도 부인되는 현상은 해소될 수 있게 됐다. ▲ 거창사건으로 숨진 669명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거창사건추모공원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거창사건추모공원. 약 5만평의 넓은 추모공원에는 하얀 눈이 소복히 내려앉았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6.25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마을 주민들이 일부 국군에 의해 학살된 사건이다. 거창사건은 일어난 지 3년만인 1954년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하면서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어서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분하여 합동묘를 조성했다.1961년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묘역은 파헤쳐지고. 위령비는 글자 한자 한자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히는 현대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에 의해 추진된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총 부지면적 16만2.423㎡(4만9.133평) 규모로 지난 1998년 착공해 2004년 준공됐다.▲ 위령탑 옆 군상 ‘참회’추모공원에서 제일 처음 만난 것은 주차장 인근의 '탄량골 학살터'. 1951년 2월 10일 국군에 의해 주민 100명이 집단 학살된 곳이다. 거창사건 세곳의 집단 학살터 중 한곳이다. 공원 입구 추모문을 들어서면 '하늘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뜻을 지닌 천유문(天?門)이 눈에 들어온다. 천유문을 지나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71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위패봉안각이 오른쪽에 있다. 진입광장을 지나면 위령탑이 우뚝 서 있다. 남자. 여자. 어린이의 무덤을 상징하는 3단의 돔 사이로 영혼이 부활해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오름을 상징하는 위령탑은 솟아 있다.위령탑 좌우측에는 군상이 있는데. 오른쪽 군상은 후손들의 정성어린 위로 속에 한을 풀고 승천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령들과 유족들을 환조로 표현했다. 좌측의 군상은 고인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국군들이 진심으로 영령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위령탑 뒤로는 669기를 영탑(靈塔) 형태로 조성하고 전통 담장을 설치한 묘역이 있다.거창사건으로 숨진 719명 중 669기는 추모공원에 나머지 50기는 인근의 덕산리 청연묘역에 조성되어 있다. 위령탑을 내려와 오른쪽에는 거창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교육관'이 만들어져 있다. 2003년 11월 완공된 교육관은 전시실과 시청각실 등을 비롯해 재판 판결문과 모형 등 사료와 영상물 등이 전시돼 교육의 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거창사건관리사업소 박경숙 담당은 "해 9만명 가량이 이곳을 찾는다. 가을 국화 축제때 가장 많은 방문객이 있다"며 "역사의 현장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고 설명했다.첫 학살이 일어난 청연마을 생존자 다섯명 중 한명이며 현재 (사)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운섭 회장은 "60년이 흘렀지만 거창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진정한 명예회복의 길은 아직도 바로 정립되지 않은 거창사건에 대한 올바른 성격 규명과 응분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지리산둘레길 5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인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리와 함양군 휴천면 점촌 마을. 유림면 서주 마을에 살던 양민 705명이 희생된 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900여m 왕산을 끼고 산길을 따라 10여분을 들어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오지이기도 하다. 추모공원으로 가는 길가에는 방곡 희생장소. 가현 희생장소 등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장소마다 보존비석이 서 있다.산청.함양 양민 학살사건은 1951년 2월7일 설명절 다음날인 이른 아침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과 유림면 일원 9개 마을에서 705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거창추모공원과 같이 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 되면서 사업이 시작됐다. 2001년 묘역사업이 착수돼 2008년 전시실 완공까지 최종 4년이 7년이 걸렸다. ▲ 거창사건 추모공원 내 위령탑추모공원에 들어서자 방문객 안내를 맡고 있는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유족회' 여용석 이사를 만날 수 있었다. 여용석 이사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사건이 발생했으며 형2명이 사건으로 인해 희생됐다고 했다. 추모공원에서 제일 처음 만난 것은 회양문(廻陽門). 슬픔과 고통의 음지의 과거를 극복하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상생의 양지로의 화합을 창출해 나가 미래의 초석을 낳는 디딤돌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다.회양문을 지난 높다란 계단을 오르면 위령탑이 높게 솟아 있다. '원혼소생상(寃魂甦生像)으로 이승의 원한을 풀고 영면에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위령탑 앞에는 희생자의상이. 좌우로는 비탄의벽과 고통의벽 등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고통의 벽에 부조된 경상대학교 강희근 교수의 헌시(獻詩) 중 '대대로 살아온 것 죄가 되는가.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라는 부분을 읽으며 희생된 이들의 한이 느껴지는 듯 했다.위령탑을 지나면 사건으로 희생된 386기를 영탑(靈塔) 형태로 설치돼 있다. 왼쪽에 205기. 오른쪽에 181기. 당시 용케 살아남은 식구 하나가 어머니·형·형수·동생·조카 이름으로 세운 비석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그나마 남은 가족조차 없는 이들을 함께 묻은 대형 무덤 2기도 한켠에 마련됐다.추모공원 최 상부 크고 웅장한 건물은 한날 한시에 숨진 386명의 위패를 모신 위패 봉안각이다. 이곳에서 해마다 추모제가 진행된다. 관리사무소와 함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는 있는 복예관은 전시실과 영상실 등을 갖춰 사건 현장 재현 등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추모공원 임영현 담당은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공간"이라며 "지리산 둘레길 코스에 포함돼 많은 사람들이 한번씩 찾아 당시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한다"고 말했다.유족회 여용석 이사는 "이미 유족 1세대 분들은 연세가 많아 세상을 등지신 분들도 많다"라며 "하루빨리 특별법이 통과돼 남아 있는 유족들의 한이 풀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 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 받았습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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