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도의원 문정섭60년대 우리 농촌경제는 곡물인 보리로 과일을 구하거나 엿장수에게 각종 고물을 주고 성냥이나 비누 엿을 교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그 시대에는 화폐가 귀했고 봄철 춘궁기라도 되면 태산보다도 높았다는 보릿고개 시절이 있었다.함양읍내 천령봉 밑 삼산리 삼수대 마을 복숭아와 지곡면 보산리 정취마을 사과라도 맛을 보려면 보리타작을 마치고 하루정도 여가를 얻어 자루에 보리를 담아 지게에 지고 문물교환을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엿장수의 짤강짤강 가위소리라도 나는 날에는 마을 내 아낙네는 물론 동네 아이들이 순식간에 마을 어귀에 다 모였다. 엿에는 생강. 호박. 깨. 땅콩엿 등이 있었고 가락엿과 반티엿(엿 함지통에 넓게 깔아 놓은 엿)이 있었다.엿장수가 마을 어귀에서 "엿 사시요!" 하고 가위소리를 내면 마을주민들과 아이들은 모시나 삼베옷 떨어진 것. 숟가락몽둥이. 고무신짝. 병모가지 깨진 것. 양은냄비나 놋그릇 깨진 것. 큰 애기 적삼. 할머니 속곳쟁이를 찾기 위해 집 마루 밑이나 부엌 찬장. 큰방 작은방을 오가며 온통 집안을 구석구석 뒤집기가 일쑤였다.고물을 찾다가 아무것도 없을 경우 일찍 엿을 구입한 아이들에게 애교를 부려 엿 한 조각을 얻어먹는 경우는 하루의 일진이 좋은 날이다. 심술쟁이 형들이 엿치기하자고 꼬셔놓고 후 불어도 엿 구멍이 작아 게임에서 지면 줄행랑을 쳐버려 하는 수 없이 엿 값을 지불했던 경우도 있었다. 반티 엿을 주는 것은 정말 엿장수 맘대로다. 고물가격을 엿장수가 임의로 정하여 엿을 주기 때문이다.요즘은 팔도각설이들이 경로잔치나 대소 행사에 초청되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나 앞으로는 아마 엿장수도 인간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당시는 마을마다 상점이 있어 술과 담배를 팔기도 했지만 어린 우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일본말로 나마가시 생과자 일종인 빵이었다.팥가루에 설탕을 넣어 달기도 하였고 맛도 최고였다. 상점에 갔다 놓은 지 오래된 나마가시는 만지면 부서지고 팥가루가 흘러 내리기 일쑤였다. 나마가시라도 사 먹으려면 집안에 있는 쌀이나 곡류를 부모 몰래 한 두 되 훔쳐내야 사 먹을수가 있었다.그 뒤 읍내 운림리 구장터에는 남빙고와 용평리 시장입구 혜성당 자리에 석빙고 얼음과자 즉 아이스케키가 생산되어 무더운 여름철 간장을 시원하게 하여 주었다. 석빙고 얼음과자는 단단하였고 물이 좋았던 남빙고 얼음이 더 맛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당시 한 여름철엔 얼음과자! 목소리만 들어도 침이 절로 나고 시원함을 느끼곤 했다.필자는 인월 장날이라도 되면 팔령도계까지 얼음과자를 잔뜩 실은 짐바리 자전거를 밀어주고 과자 2개를 얻어먹곤 했다. 음력 10월 보름전후 마을주변에 묘사라도 있는 날에는 동생이 있는 아이들은 동생을 등에 업고 동생이 없는 아이들은 베개를 업고 2인분을 타기 위해 코 묻은 손수건을 펼쳐들고 줄을 섰던 일들도 지금은 사라진 추억들이다.이처럼 어려웠던 시절이 불과 50여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5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우리만큼 풍요하게 잘사는 나라는 없다. 보리로 과일을 사먹고. 각종 고물로 엿을 사먹던 추억도 이제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 우리네만의 추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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